바우하우스 인물연구-모흘리 나기
- 최초 등록일
- 2007.02.26
- 최종 저작일
- 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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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바우하우스 인물연구 리포트_모흘리 나기의 일대기를 모두 작성한 리포트 입니다.
목차
■ 전기적 기록
█ 바우하우스와 모흘리 나기
█ 교육이론과 실천
본문내용
한편 그로피우스로서는 모흘리 나기의 활약으로 그의 이념의 실현자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흘리 나기는 그로피우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으므로 바우하우스 초기의 중심인물이 잇텐 이었다고 한다면 전시회 이후에는 모흘리 나기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는 바우하우스 총서의 공동 편집자이고 또한 그 가운데 2권을 직접 집필했다.
1928년에 베를린으로 옮겨 영화와 무대구성(피스카토르와 국립 오페라를 위해)을 시도했다. 그는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이탈리아, 그리스 등지를 여행하였으며 1934년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체재하였다. 다음해 2년 동안은 런던에서 주로 만화영화라든가 기록영화에 관한 일을 하였다. 1937년에 그는 <뉴우 바우하우스>의 지도를 인계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시카고 미술공업협회에 의해서 설립되었으나 경제적 곤란 때문에 다시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38년 시카고에 자신의 학교를 개설했다. 즉, <디자인 학교>가 그것이다. 모흘리 나기는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는 사진술(포토그램)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진실주의의 요소와 사실적인 요소, 논리적인 도식요소를 아울러 갖춘 구도를 가진 예술적 또는 심리학적인 광고술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