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서태후
- 최초 등록일
- 2007.03.12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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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태후 서평입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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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태후(1835~1908)의 성은 예허나라, 이름은 옥란 또는 난아이다. 함풍황제(咸豊皇帝: 1831~1861)의 의귀비(懿貴妃)이자 동치황제(同治皇帝: 1856~1875)의 생모로, 함풍황제가 병사한 후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동치황제 재위 기간과 광서황제 재위 초기, "백일유신" 진압 이후, 이 세 차례에 걸쳐 그녀는 수렴청정을 하였으니, 동치~광서 시기에는 그녀가 바로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48년간 집권을 하다가 74세 때 세상을 떠났으며, 묘지는 정릉(定陵: 지금의 하북성 준화현 보타욕 )에 있다.
1851년 자희는 예허나라씨 중에서 궁녀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5월 9일 17세의 나이로 입궁하여 귀인(貴人)에 책봉되었다가 1855년 2월 의빈(懿嬪)으로 승격되었다. 1856년 3월 아들 동치황제를 출산하였으며 그녀는 황후로 지위가 상승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방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남방의 노래(특히 산서민가)를 잘 불렀으며 이로 인하여 황제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자희는 그림과 연극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연극은 황후가 된 이후 매일보았다. 따라서 자희는 연극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궁한 그녀는 처음에 궁에서의 생활에서 희망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다 스스로 이러한 생활에서 희망을 가지고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야심찬 꿈을 가지게 되었다.
자희황후는 어지러운 국정과 외세의 위협에 흔들리는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는 역사서를 많이 읽었으며 현인들을 만나 공부를 하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희황후는 함풍황제의 몸이 많이 쇄약해지고 국정을 논하는 것에 대해 많이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허락을 받아 접견실의 가리개 뒤에 앉아 대신들의 말을 듣고 난 뒤에 그 동안 공부했던 지식들을 바탕으로 함풍황제에게 그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녀는 과감한 결단력과 뛰어난 두뇌의 면모를 보였다.
참고 자료
연인 서태후, 펄 S.벅 저,길산, 2003.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