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1592년, 조선과 일본은 7년에 걸쳐 격렬한 전쟁을 치루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그 당시 조선과 일본 각 국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은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강력했던 히데요시 가문이 멸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어남으로 인해 막부세력의 교체를 일으켜온 전쟁이 되었다.
그 격렬했던 전쟁 중에서도 주목할 점은 항왜, 즉 조선에게 항복한 일본 군사들일 것이다. 그 군사들 가운데서도 필자의 눈길을 끄는 사람은 본명이 沙也可인 김충선이라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병시킨 부대의 오른손이었다. 이런 인물이 왜 조선에 투항하였고, 이 인물이 투항하게 되는데 한․일간의 사상적 교류가 어떤 원인을 펼치는지 간단하게 서술하겠다.
목차
Ⅰ. 序論
ⅰ. 임진왜란을 준비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ⅱ. 임진왜란 전의 문물교류 상황
Ⅱ. 本論
ⅰ. 조선 전기의 사절의 왕래와 문물교류
1. 조선과 일본의 사절
1) 조선 측의 사절
2) 일본 측의 사절
2. 문물의 교류
ⅱ. 사야가 김충선이란 누구인가?
ⅲ. 김충선이 항복한 까닭은?
Ⅲ. 結論 - 김충선을 통해본 한일 사상의 교류
* 참고문헌(參考文獻)
본문내용
조선전기 일본으로부터 파견된 사절은 형식적으로 보면 도항왜인 전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교역만을 목적으로 온 경우에도 반드시 외교적 절차를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입국왜사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실정막부 장군이 조선국왕 앞으로 보낸 일본국왕사만도 60여회에 이른다고 한다. 국초부터 규슈지역의 호족을 비롯한 사절이 경쟁적으로 내도하였고, 제추사의 통교가 대마도주의 문인 통제로 일원화 된 이후에도 사송왜인들이 계속 도항하여 절대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경제적 실익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에서 사절을 보낼 때 정사(正使)는 주로 교토5산(京都五山)의 승려가 임명되었다. 당시 교토 5산의 선승(禪僧)들은 그 이전까지 외교를 담당하였다 공가(公家)를 대신하는 교양 집단으로서 실정막부의 외교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일본국왕사를 제외한 거추사나 제추사 같은 사절들은 대부분 교역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조선정부에서 반드시 외교적 절차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상관․부관 등 체계적인 직책이 필요하였으며, 그들이 서계를 바치고 조선국왕께 숙배(肅拜)하는 등 사절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일본 국왕사의 파견 목적은 국교재개와 수호, 회례와 보고, 조선왕실의 경조사에 대한 문위(問慰), 明에 대한 통교 주선 요청, 조선 국정탐색 등 정치적인 것과 함께 대장경 구청(求請), 사원 건립을 위한 재정지원 요구등 문화․경제적인 것까지 다양하였다. 공식적인 사행목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일본국왕사의 경우에도 공무역을 통한 교역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거추사와 제추사의 경우 사행 명목은 왜구 진압 보고, 피로인 송환, 조약체결에 따른 교섭, 대장경 구청 등이 있었지만, 교역이 주목적이었음은 물론이다.
2. 문물의 교류
조선은 문물교류 면에서는 수입보다는 수출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고려대장경(八萬大藏經)을 비롯한 불경, 범종, 불구(佛具)등 불교 문화재였다. 그 밖에 일부 유교서적과 문집류 등도 요청에 의해 증여되었다.
참고 자료
○하세가와 쓰토무 著, 조여주 譯, 『귀화한 침략병』, 현대문학, 1996.
○이진희․강제언 共著, 김익한․김동명 共譯, 『한일교류사-새로운 이웃나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학고재, 1998.
○조항래․하우봉․손승희 編, 『講座 韓日關係史』, 현음사, 1994.
○니토베 이나조 著, 양경미 譯,『사무라이-무사도를 통해 본 일본 정신의 뿌리와 그 정체성』, 생각의 나무,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