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민란
- 최초 등록일
- 2007.05.10
- 최종 저작일
- 2007.01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조선후기 민란에 대해
저항의 배경, 저항의 표출, 저항의 연속 파트로 나누어 요약한 것입니다.
목차
1. 저항의 배경
2. 저항의 표출
1)홍경래의 난
2)임술농민봉기
3. 저항의 연속
본문내용
조선후기의 민란
1. 저항의 배경
☞ 조선후기에 사회, 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모순(왕도정치가 무너진후 세도정치→탐관오리의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장되어 갔다.
(1) 광범위한 저항세력
1) 농민 : 세금감당 어려움 → 도적, 화전민, 광산노동자로 전락하거나 해외로 이주
2) 몰락 양반 : 종래의 관직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포섭 불가능
3) 상인 : 경제적 성장에 비해 사회적 지위 없음
4) 중인 및 서얼 : 학식과 경제력 갖췄으나 정당한 대우 못받음
(2) 저항의 형태
1) 초기 :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방식으로 불만 표출(소장, 나쁜소문 퍼뜨리기, 횃불 시위)
2) 후기(18세기 중엽~ 19세기 본격화) : 무장 봉기 형태(홍경래의 난, 임술농민봉기)
2. 저항의 표출
(1) 홍경래의 난(1811)
1) 배경: 1728년(영조 4)의 이인좌의 난은 주도층이 비록 과격한 소론 중심의 지배층이었지만 중간층 및 하층민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기층 세력의 저항이 격화되는 양상을 반영하였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지역민들의 불만이 더욱 컸다. 또한 양반세력이 미약하여 관리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평양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중앙정부의 손쉬운 약탈 대상이었다.
2) 지휘부 구성 :용강의 평민 출신으로 유교와 풍수지리 등을 익힌 지식인이자 용력을 갖춘 장사인 홍경래는 봉기 10년전부터 각처를 다니며 사회 실정을 파악하고 동료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비슷한 성격의 지식인이자 상인인 우군칙, 명망있는 양반 가문 출신의 지식인 김사용, 역노 출신의 부호로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 장사로서 평민 출신의 홍총각과 몰락한 향족 출신의 이제초 등이 최고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의 신분과 생업은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지만, 용력을 갖춘 지식인이 총지휘를 하고, 저항적 지식인이 참모를 맡았으며, 부호가 봉기 자금을 대고, 뛰어난 장사들이 군사 지휘를 담당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 밑에 평양의 양시위, 영변의 김운룡을 비롯한 장사들이 군사 지도자로 참여하였다. 이 장사들은 주로 홍경래의 조직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든 인물들이었으며, 봉기 당시 30~40명 가량이 적극적으로 항쟁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