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 최초 등록일
- 2007.05.17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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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프리초서의 생애, 문학적 생애&작품경향, 시대적배경 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목차
1. 초서의 시대
2. 초서의 생애
3. 문학적 생애와 작품경향
4. 컨터베리 테일즈 (간략)
본문내용
Geoffrey chaucer (1342~3 - 1400.10.25)
‘영시의 아버지’라 불리 우는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는 중세 영국 최대의 시인으로 근대 영시의 창시자이다. <초서라는 이름은 신발 제조업자라는 뜻의 프랑스어 `소시에르`(chaussier)에서 유래 되었다. >
초서의 시대
제프리 초서가 살던 시기인 14세기 중세의 사상은 실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중세 영국은 귀족계급과 일반 평민 계층, 둘 사이의 어떤 계급도 인식하지 못했고, 그 신분은 태어나면서 동시에 결정이 되어버리는 것이었으며 신분 상승의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 와중에 중산계급층은 거대하게 증가하고 있었으며, 이 계층이 지속적으로 귀족계층에 편입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중산계급층이 바로 제프리 초서가 속해있던 계층 이었다.
초서의 생애
초서는 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궁정에 출사하였으며, 아버지의 교육적 열의에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자랐지만, 런던의 실제 현실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는 유년기서부터 중세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도 유창하게 할 수 있었고 또한 라틴어와 이탈리아어에도 능숙했다. 궁정생활 도중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했는데, 프랑스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당시나 그 이전의 중요 서적들과 상당히 친숙해 있음을 알 수 있다. 1357년에는 에드워드 3세의 제3왕자 라이오널(Lionel)의 부인 전속 시동(侍童)이 되었다. 백년전쟁에 종군하여 1359년 프랑스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면되어 귀국하여 궁정에서 위사(衛士)ㆍ방패 봉지자(捧持者) 등으로 근무했다. 그는 아내 필리프(1387년 사망)의 연줄로 제4왕자 존(John)의 권고(眷顧)를 평생 받았다. 1372∼1373년에는 특명을 받아 제노아 및 피렌체에 갔었다. 이때 아마 보카치오 및 페트라르카와 회담한 것으로 추측된다. 1376년 런던 항(港) 세관의 감시관에 임명되었다. 1376년과 이듬해에는 첩보(諜報) 임무를 띠고 프란드르로 가고,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