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중세에서의 공포, 흑사병
- 최초 등록일
- 2007.05.23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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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학과 전공수업 `유럽문화`시간에 작성한 과제입니다.
요약내용 읽어보시고, 필요하신분 받아가세요.
목차
1. 최초로 유럽에 퍼지던 날
2. 피해 경과 및 사례
3. 르네상스도래 이유설
4. 유행 당시의 치료법이라 불렸던 행위들
5. 대학살로 몰고 간 유대인에 대한 유언비어
6. 유대인의 피해가 적은 이유
7. 흑사병의 소멸
8. 흑사병 이후 경제변화 / 노동자들이 소중해짐
9. 흑사병으로 인해 농노제가 사라짐
10. 도시의 새 주인들
11. 흑사병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
12. 결론
본문내용
2. 피해 경과 및 사례
1347년, 가을에 이탈리아를 강타한 흑사병은 같은 해 말에는 마르세유와 아비뇽을 전염시켰고, 1348년에는 프랑스 전체를 휩쓸었다. 예컨대 흑사병으로 인해서 당시 5만에 육박하던 피렌체 시의 인구는 무려 5분의 1로 줄어 들었고, 파리 시의 인구는 15만에서 5만이 죽었다고 한다.
1349년에는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도 상륙하여 이듬 해에는 영국 전체를 공포로 몰아 넣었고, 영국은 거의 절반의 인구를 잃었다. 이 때 스코틀랜드는 적국인 영국이 흑사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그들을 물리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다. 영국인들을 공격했던 스코틀랜드 병사들 역시 흑사병에 감염되었고, 고국으로 돌아 온 병사들에 의해 이 병이 퍼져 나가 스코틀랜드 전체가 흑사병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350년에는 흑사병이 북유럽을 거쳐 아이슬랜드와 러시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흑사병이 빠른 속도로 전염된 이유는 당시 활발한 무역에 의한 잦은 왕래와 도시의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이었다.
수년 간에 걸친 흑사병의 유행은 전 유럽에 엄청난 결과를 몰고 왔다. 물론 흑사병의 화를 면한 곳도 없지 않았으니 도시와 농촌, 신분이나 성별의 구별 없이 모든 유럽인들을 죽음의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인구가 줄어 들은 유럽에는 무시무시한 침묵과 신음 소리만이 널리 퍼져 있었다.
흑사병의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무엇보다도 인구가 밀집했던 도시 지역이었다. 무려 도시의 인구의 절반이나 감소되었다. 병이 확산되어 감에 따라, 도시 밖에 세워진 공동 묘지에 시체를 묻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시골에서도 그 영향은 즉각적이고 확실하게 나타났다. 땅을 경작할 노동자들이 줄어 듬에 따라 농토는 황폐해져 갔다. 가축들은 떼 죽음을 당했다. 독일에서는 경작을 하지 않는 땅이 60%를 넘었다. 카스티야 지방의 경우,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위험할 정도로 시골의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다. 경제 전체가 농업에 의존하고 있던 당시 사회에서 주민 수의 감소는 곧 식량의 감소를 뜻했다. 거의 위험 수준에 도달한 주민 수로 인해 땅을 황폐해졌고,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