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시대별 입시교육과 시험
- 최초 등록일
- 2007.06.06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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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대별 입시교육과 시험에 대한 자료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Ⅰ. 일제시대
Ⅱ. 해방이후의 한국의 교육경향
Ⅲ. 해방이후 ~ 1950년대
Ⅳ. 1960년대
Ⅴ. 1970년대
Ⅵ. 1980년대
Ⅶ. 1990년대
Ⅷ. 2000년 ~ 현재
<참고문헌>
본문내용
Ⅱ. 해방이후의 한국의 교육경향
경제발전의 부작용 ‘교육열풍’, 1945년 8월. 드디어 압제의 사슬이 끊어졌다. 하지만 독립의 기쁨도 잠시, 곧 이어진 민족분단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미군은 군정수립 직후부터 의무교육 실시를 선언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예산은 치안비와 선전비에 쓰여졌고, 그나마 교육비에 쓰여지는 예산도 서울대학교로 이름이 바뀐 옛 경성제국대학에 대한 집중투자로 이어졌다. 해방은 됐지만 민중들은 조악한 한글교재로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군정 3년만인 1948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지만 2년 뒤 발발한 한국전쟁은 그나마 민중들이 누려오던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했다. 그러나 피난지에서도 임시학교의 문은 열렸고,민중들은 그 속에서 교육이 생존과 직결돼 있다는 점을 점차 깨우쳐 나갔다. 일제시대 교육은 특정집단의 가능성과 희망일 뿐이었지만 이때부터 교육은 모든 민중의 희망이 됐다. 더불어 교육경쟁도 치열해졌다.
해방직후 설립된 초기 대학들은 자체적으로 학생들을 선발했다. 하지만 지원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게 되자 대학들은 자율성을 악용해 갖은 입시부정을 저질렀다. 이에 정부는 입시부정과 비리를 막겠다는 명목으로 국가가 관리하는 시험제도를 도입했다. 오늘날 정부와 대학 사이의 자율성을 둘러싼 갈등의 시초였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사회는 대졸실업자들이 넘쳐나 ‘대학망국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급인력을 수용할만한 그릇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박정희 정권 시절인 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행되고, 이후 본격적으로 대졸자들이 산업계로 흡수되면서 상급학교 진학률을 폭발적으로 높이는 계기를 맞이했다. 더 나은 보수, 더 빠른 승진을 위해 소위 ‘일류학교’로 학생들이 몰렸고 그와 동시에 일류 중학교, 일류고등학교 식으로 모든 학교들의 서열화가 시작됐다. 때문에 당시 가장 심각한 입시열풍은 13세 초등학생들에게서 나타났다. 실제로 63년 겨울, 전기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일어난 ‘무즙파동’(엿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재료의 정답은 디아스타제였으나 일부 학생들이 무즙을 써 낙방하자 학부모들이 직접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서울시교육감에게 제시한 사건)은 이같은 세태를 대변해 주는 대표적인 촌극이었다. 정부는 중학교 입시파동이 반복되자 68년 중학교 평준화를, 72년엔 고교 평준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뺑뺑이’로 불리는 평준화 정책은 모든 모순을 대학입시로 집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고 자료
김선호, 2006, 대학입시제도와 대학교육, 장락
윤영선, 2004, 함께 읽는교육이야기, 다산출판사
김대현, 2005, 교육과정 및 교육평가, 학지사
논문, 해방후 우리나라 교육과정, 김수천, 2004
논문, 우리나라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구조 변천에 관한 연구, 한국교육과정학회
논문, 우리나라 대학입시 과영경쟁에 대한 인식 조사, 한국교육평가학회, 지은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