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측우기의 발명
- 최초 등록일
- 2007.07.01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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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측우기의 대하여 사료적 그리고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조사 작성한 리포트 입니다.
각각의 주제마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목차를 참고해 주세요
목차
1. 측우기란
2. 한국사적 관점에서 본 측우기
3.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 측우기
4. 측우기 외에 선조들의 기상 관측 기구들
5. 현재의 우량계
6. 우리나라의 강우량 기록
7. 측우기 발명의 우수성과 측우기에 관한 조사자의 의견
본문내용
1. 측우기란?
1441년(세종 23년)에 발명한 우량계이다. 이는 세계최초의 우량계의 발명이며 이탈리아 의 Benedetto Castelli가 만든 우량계(1639)보다 198년이나 먼저 만들어졌다. 측우기는 철 또는 청동으로 만든 원통형의 측우기본체와 이를 안치하기 위하여 돌로 만든 측우대, 그리고 고인 빗물의 깊이를 재기 위한 자(주척을 사용함)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서 언급한데로 측우기는 세종 23년(1441)에 발명되어 관상감(觀象監)과 각 도의 감영(監營) 등에서 우량측정용으로 사용되었고 지방에서는 이 측정치를 중앙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측우기로서 측정한 우량 관측기록은 비록 초기기록들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1770년 이후 서울의 관측기록은 140여 년분이 남아 있어서 현대의 관측기록까지 합하면 210년 이상의 연속 관측이 되므로 세계 최장 관측기록으로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세종 때에 만들어진 초기의 측우기는 남아 있지 않으며 1837년에 제작되어 공주 감영에 설치했던 금영 측우기가 남아 있다.
측우기는 1910년경만 해도 경복궁의 관상감과 함흥․대구․공주의 감영 등에 4기가 보존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으나, 지금은 금영측우기만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대구감영의 측우기는 1950년까지 서울측후소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6․25동란 중에 없어졌고, 공주감 영의 금영측우기는 일본으로 반출되어 일본 기상청에 보관 중이었는데 우리문화재반환 운동의 일환으로 1971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 기상청에서 보관중이다. 이것이 지금은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진품 측우기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가 올 때마다 비가 그치면 측우기 속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푼(푼 ; 약 2mm) 단위까지 측정해서 보고하게 하였다. 각 도의 감영에서는 측우기를 나누어 주었고, 군 이하의 관청에서는 자기 또는 도기로 만들어 쓰도록 하였다. 자는 주철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지만 군 이하에서는 나무자 또는 대자를 쓰도록 하였다. 즉, 이때에 벌써 전국적인 우량관측망을 만들었으니 현대적인 기상관측의 개념이 이미 싹트고 있었음을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 때문에 측우제도는 거의 중단 되어 버렸다. 영조대(1770)에 와서 다시 이를 부흥시켰으며, 측우기는 1442년의 예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때부터 관측하기 시작한 서울의 우량은 현재까지 계속되어 한 장소의 연속 관측 값으로는 위에서 언급한데로 세계최장의 기록을 자랑하고 있다.
참고 자료
참조 사이트 : http://www.kma.go.kr/k_chuk.htm
http://cyberlab.honam.ac.kr/javap/korea/explane/ex01.htm
http://www.koreavisuals.com/cyberseum/wwwroot/koreaness_cyber_park/i/i07.htm
http://www.mogaha.go.kr/ndch/hisf/ancf/wisf/wis_c7_1.htm
http://www.chemmate.com/news/c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