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여왕마고 감상문
- 최초 등록일
- 2007.07.15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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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화 `여왕마고` 감상문입니다.
카트린드메디치, 샤를9세, 여왕마고 순으로, 인물 평을 중심으로 썼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여왕 마고”는 종교와 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물든 16세기의 혼란한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다. 영화의 화면을 가득 채웠던 우울하면서도 강렬한 붉은 빛이 마치 당대 프랑스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듯하다. 프랑스에서 가장 잔인한 학살일로서 기억되는 성 바르톨로메오의 학살사건을 말하기에 앞서 위그노와 가톨릭과의 갈등을 둘러싼 세력다툼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톨릭과 위그노의 대립은 앙리2세 때부터 격화되었다. 앙리2세는 마고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치의 남편이다. 앙리2세는 이전의 프랑수아1세보다도 더 가혹하게 위그노를 박해하였고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를 당시 강력했던 가톨릭 국가 에스파냐의 펠리페2세에게 시집보내는 등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앙리2세 사망 후 위그노 전쟁이 시작된다. 그 결과 앙리2세가 다져놓은 왕권은 종교전쟁으로 약화되었다. 어린 아들들이 왕위에 올랐기도 했고, 귀족들의 힘이 강했으며, 종교전쟁이라는 상황 등이 맞물렸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왕권의 약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귀족가문은 기즈 가인데 앙리2세의 죽음 이후 프랑수와 1세 때 섭정을 행함으로서 힘을 키웠다. 왕의 어머니인 카트린을 배제하고 기즈 가문이 섭정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앙리2세의 죽음이 곧 왕권의 약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앙리2세의 죽음은 급작스런 사고였기 때문에 대처할 방도도 없었다. 그러나 앙리2세의 장남 프랑수아2세는 왕위에 오른 후 1년 반 만에 곧 병사하여서 차남이었던 샤를9세가 왕위에 올랐다. 샤를9세는 당시 10살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역시 직접 통치할 수 없었는데 이때부터 카트린이 실권을 잡고 섭정이 약 30년 동안 이어나간다. 이후 기즈 가문에 의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카트린의 최대목표는 미약한 왕권을 지켜내어 자식들의 왕위 보전이었다고 생각된다. 앙리2세의 죽음 이후에서야 발발한 종교전쟁을 생각한다면 혼란한 상황의 타개를 위해서 카트린이 해야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왕권의 강화였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장 오리외, 『카트린 드 메디치』, 들녘,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