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 정치 -보수 정치의 확대
- 최초 등록일
- 2007.07.18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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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전후 정치에 대한 리포트 이며 시대구분은 보수정치의 확대 부분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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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보수 정치의 확대
전후 “55년체제”가 성립된 이래 좌․우 사회당이 일본사회당으로 통합되고, 자유당과 민주당이 통합되어 자유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보수의 자민당과 혁신의 사회당이라는 양대 정당구조로 재편된 새로운 정치체제를 보인다.
그런데 보수, 혁신 양대 세력이 서로 대치하는 정치 상황이 조성되기는 하였으나, 정당체제의 측면에서 보면 다당제 하에서 자민당 “1당 지배”가 장기적으로 관철되고 사회당이 대표하는 혁신 세력을 중심으로 한 야당 세력은 정권에 도전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사회당을 비롯한 야당 세력은 “만년 야당”에 머무르게 됨으로써 이른바 “1.5당제”라 불리기도 하였다.
위에서 말한 1.5당제라 불리는 보수 정치를 확대 및 장기 정권이 가능했던 원인을 토대로 일본 정치의 특징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신경제정책에 대한 대응 실패로 사토정권 한계를 들어 내게 되고, 결국 정치적 지도력의 상실로 인해 1972년 퇴진하게 된다. 사토는 퇴진 과정에서 후임 자민당 총재를 지명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가쿠 - 후쿠 전쟁”이라 불리는 내부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가운데 다나카는 282표로 190표를 획득한 후쿠다를 크게 제압함으로써 “서민 재상”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이 들어선다.
1960년대 후반의 경제성장이 끝난 시점에 등장한 다나카 내각은 새로운 정치․경제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국민에게 강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기대에 부합하고자 다나카 내각이 추진한 정책 중의 하나가 중․일 국교 정상화였다.
다나카는 1970년대 고도 경제성장을 재차 실현하기 위해 “일본열도개조론”를 생각했는데, 이는 지방에 내류형의 공업도시를 분산시켜, 9천키로 신칸센 철도망과 1만키로 고속도로망이 이들을 연결한다는 계획 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공공사업 및 지역개발에 의한 내수주도형 프로젝트는 고도성장을 재차 가져오지 못하고 재정적자의 확대와 물가상승만이 초래되었다. 특히 의료제도와 관련된 제도 등으로 예산이 증가되고, 이는 물가상승을 가속화시켰고, 이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에 설상가상으로 1973년 가을 오일 쇼크가 겹쳤다.
다나카 정권이 시도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정책은 서서히 동요되기 시작한 자민당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 이였는데, 이를 실패하고 1974년 참의원 선거에서 하락 일로에 있던 다나카는 대승을 거둠으로써 이를 만회하려 한다. 우선 다수의 탤런트 후보를 자민당에 입후보시키는 한편 금권선거 운동을 전개한다. 선거 결과에 따라서 여․야 당간에 역전도 가능한 위기감에서 다나카 정권은 기업으로부터 엄청난 선거자금을 모집하게 된다. 이는 다나카가쿠에이 연구라는 논문에서 금맥과 인맥이라는 비판적 글이 실리면서 도리어 위기를 심화
참고 자료
일본 전후 정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