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광해군의 삶의 궤적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7.07.21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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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의 삶을 중심으로 광해군과 북인정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고자 했으며,
대명, 대청 외교전략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미시적관점에서의 역사를 지향했으며, 개인사적 측면에서 서술했습니다.
2007년 1학기 서울대학교 한국사수업에 제출했던 레포트구요.
학점은 A+나왔습니다. 분량은 12쪽입니다.
조선중기정세를 레포트로 쓰신다면,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정인홍에게 광해군이 거듭 출사를 종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정인홍이라는 존재가 정치적 사상적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정인홍에 대한 평가는 대표적인 간신, 역적 등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런 평가는 현재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정인홍이 왜란당시 경상우도에서 의병장으로써, 경상우도로 왜군이 진격하지 못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실은 간신(奸臣)이라는 평가와 비교했을때 매우 역설적이다. 정인홍은 영남유학의 태두 남명 조식(曺植)의 계보를 있는 뼈대있는 사림이었다. 그는 1573년 나라에서 가장 명망있는 다섯명의 사림-오현사(五賢士) 중 한명으로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받았다. 이후 출사와 사퇴를 거듭하다 사헌부 장령으로 재직하면서 방납의 폐해를 직간하고, 지방수령의 부패를 탄핵하는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 인조집권 이전의 정인홍에 대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정인홍을 간신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정인홍이 오현사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그가 당시에 가장 존경받는 사림 중 한명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 사림들에 비교할 때 정인홍의 가장 구별되는 특징은 유교적 이념의 ‘실천’에 있었다. 이는 초기유교의 근본정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근본적 유교이념은 수기이후에 치인하는 것에 있다. 치인이라는 것을 통해서 유학은 사회적 이념으로서의 측면과 실천적 규범으로서의 측면을 연결지을 수 있다. 따라서 초기유학은 결코 현실문제에서 괴리되지 않는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특징을 보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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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왕과 친인척>, 지두환
<명말(明末)의 건주여진(建州女直)과 팔기제(八旗制)의 기원>, 서정흠(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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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대의 대북정책과 국정의 동향>, 한명기(1988)
<선조대 초반부터 인조대 후반 대명관계 연구>, 한명기(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