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소현세자에 대한 고찰
목차
Ⅰ. 머리말
Ⅱ. 시대적 배경
1. 仁祖反正 前後의 明淸 관계
2. 胡亂과 朝淸관계
Ⅲ. 瀋陽에서의 활동
1. 외교활동
2. 大明大淸 認識의 變化
3. 서양문물의 見聞
Ⅳ. 歸國 後의 活動
1. 歸國과 죽음
(1) 昭顯世子의 歸國
(2) 歸國 무렵의 朝鮮정세
(3) 昭顯世子의 죽음
2. 昭顯世子 죽음 이후의 몇 가지 문제
(1) 昭顯世子의 장례문제
(2) 원손폐위 문제
(3) 世子嬪의 처벌문제
Ⅴ.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昭顯世子는 仁祖의 장자로, 효종의 형이며 이름은 炡이다. 어머니는 한준겸의 딸 仁烈王后이다. 1625년 世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姜碩期의 딸인 민회빈강씨이고 보통 姜嬪이라고 부른다. 1636년 丙子胡亂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淸에 항복한 후,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淸에 볼모로 끌려갔다. 이후 9년간 瀋陽의 瀋館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동시에 朝鮮과 淸 사이에서 창구역할을 맡아 朝鮮인 포로 도망자의 속환문제, 淸의 朝鮮에 대한 병력 군량 선박 요구, 각종 물화의 무역 요구 등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하였다. 1640~1642년 仁祖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歸國하였고, 1644년 淸 제9왕 多爾袞의 원정군을 따라 北京에 들어갔다. 北京에서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그로부터 서양 역법과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 받고 천주교에 관해 소개받았다. 1645년 영구 歸國하였으나 淸에서의 행실을 문제 삼아 仁祖의 냉대를 받았고 급기야는 병을 얻어 急死하였다.
甲午改革 이전에 있어서 우리 사회는 세 번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가졌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서구과학과 천주교에 대해서 비상한 호의와 관심을 가졌던 昭顯世子가 즉위하였을 경우이고, 두 번째는 서구과학자들을 우리나라에 초빙하자는 朴齊家의 건의를 正祖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경우이고, 세 번째는 東學軍의 신속한 북상이 성공하여 정권을 잡았을 경우이다. 어느 경우나 소외된 환경은 그러한 가능성의 발전을 봉쇄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소의 가능성을 내포한 특출한 기회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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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illok.history.go.kr/
- www.naver.com/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