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전법
- 최초 등록일
- 2007.10.10
- 최종 저작일
- 2007.09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할인쿠폰받기](/images/v4/document/ico_det_coupon.gif)
소개글
고려말 이성계와 급진개혁파가 추진했던 토지개혁에 대한 글입니다.
목차
1. 서론
2. 산천을 경계로 삼았다.
3. 토지개혁과 그 한계
4. 결론
본문내용
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진 반면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토지를 빌려 일 년 내내 부지런히 고생해도 식량은 오히려 부족하였고, 부자는 편안히 앉아서 손수 농사를 짓지 않고 용전인(소작인)을 부려서도 그 소출의 태반을 먹었다. 국가에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그 이득을 차지하지 못하니, 백성은 더욱 곤궁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졌다.
- 《조선경국전》<부전> ‘경리’조 -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급진개혁파 사대부들은 문란해질대로 문란해진 고려의 토지제도에 손을 대었다. 이들은 권문세족 등의 기득권 세력에 맞서 혁명적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이들의 개혁은 과연 성공하였을까?
2. 산천을 경계로 삼았다.
고려말 토지제도의 문란을 《고려사》는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심하다. 그 규모가 한주 보다 크며, 군 전체를 포함하며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집안의 토지 소유가 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 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수의 권세가들이 토지를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다수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참고 자료
조선선비 살해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