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 남북한의 정치노선-신탁통치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07.10.14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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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반도는 동남쪽으로는 120 마일의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이 위치하고 있고, 서북쪽으로는 중국 만주와 압록강을 사이로 접경하고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두만강의 일부를 사이로 하여 소련과 연접하고 있는 그 전략적 위치 때문에 이들 외세와 경쟁 관계에 있는 구미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왔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의 근현대사는 이러한 외세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민족적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다. 1945년 8월 15일, 세계 2차 대전의 종결은 한반도에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었지만 미소 냉전체제의 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국면이 가미되어 남북한 분단의 고착화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2차 세계 대전 종결후의 세계정세를 간단히 살펴보고, 미국과 소련의 신탁 통치 결정에 대한 반응으로 본 정치권의 대외 인식을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2.1. 2차 대전 종결 후 국제 정세 및 한반도 문제
2.2. 해방정국의 한반도내 정치활동
-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과 좌절
- 좌익과 우익 정치 세력의 조직화
2.3. 신탁통치와 좌우 균열
- 모스크바 3상 회의
- 찬탁과 반탁의 대립
Ⅲ. 결론
본문내용
Ⅱ. 본론
2.1. 2차 대전 종결 후 국제 정세 및 한반도 문제
전시연합국회담과 한반도 문제
1943년 초부터 전후의 평화 및 안전보장기구 문제가 연합국 사이에 논의될 정도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연합국 특히 미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점령 아래 있던 식민지의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해 유의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국의 장래에 관해 고려하게 되었다. 전후 한반도 문제가 연합국에 의해 최초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43년 11월 23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였다. 미국의 루스벨트에 의해 주도된 이 회담에서 한반도는 즉각 독립이 아닌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독립이 허용될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서를 붙여 놓은 상태로 마무리 지어졌다. 루스벨트는 1943년 11월 28일 테헤란에서 스탈린, 처칠과 회담을 갖고, 여기서도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 논의하나 구체적 합의 없이 다만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루스벨트의 구상을 스탈린이 구두로 동의한 상태에서 일단락되었다. 그 후 한반도 문제는 1945년 2월 4일 얄타회담에서도 논의되었으나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고 한반도 문제가 마지막으로 논의된 1945년 7월 26일 포츠담회담에서도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자유로운 독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미국이 극동 지역의 전후 처리 문제와 한국 문제들을 고려함에 있어서 여러 요소들이 작용했는데 그 요소 들을 살펴보면, 우선 일본이 장차 팽창 정책을 전개하지 못하도록 한국을 비롯한 일본 점령 지역의 독립을 약속하게 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미국이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의 전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소련군의 극동 참전을 적극 권장하였고, 이는 한반도를 비롯한 극동문제에 소련의 개입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수립된 소련과 연합국 사이의 협조가 전후에도 계속되리라고 미국은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극동지역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는 후에 냉전체제로 인해 극명하게 대립하게 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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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www.arm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