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에 대한 엇갈린 평가 -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가, 제국주의 침탈의 첨병인가.
- 최초 등록일
- 2007.10.15
- 최종 저작일
- 2007.06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김대건 신부에 대한 엇갈린 평가를 주제로 작성한 리포트입니다.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김대건 신부에 대한 대조적인 평가를 조명해보고
현재 우리나라 종교계의 시각과 역사적 평가을 참고해 결론을 제시해보았습니다.
한국사 관련 수업에서 A 받은 자료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목차
< 김대건.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가, 제국주의 침탈의 첨병인가. >
─ Ⅰ. 김대건 신부는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였다.
1. 종교사적 의미
2. 근대화의 선구자
─ Ⅱ. 김대건 신부는 제국주의 침탈의 첨병이었다.
1. 김대건 처형, 종교적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2. 김대건 신부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 Ⅲ. 김대건 신부의 평가에 대한 개인적 견해
본문내용
1. 김대건 처형, 종교적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조선 정부의 김대건 처형이 과연 종교적 문제인가.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1846년 6월 시점만 해도, 조선 정부는 김대건 신부를 처형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 정부의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에게 세계지리에 대한 책을 써 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로, 김대건 신부와 서양문화에 대해 `열린 마음` 혹은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물론 이러한 태도는 몇몇 대신들에 국한된 태도였다는 비판도 있다) 또 이 시기는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던 풍양 조씨 세력이 이미 몰락한 때였다. 당시의 집권 세력으로서는 천주교에 대해 그다지 반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러던 조선 정부가 김대건 처형 쪽으로 급선회한 것은 프랑스인 신부 3명의 처형을 문제 삼아 충청도 홍주 앞바다에 침투한 프랑스 해군 함대 때문이었다. 김대건 신부에 대해 종교적 반감은커녕 문화적 호기심마저 갖고 있던 조선 정부를 강경 노선으로 내몬 것은 바로 프랑스 함대의 침투였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정부의 김대건 신부 처형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문제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