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의 신진사대부
- 최초 등록일
- 2007.10.29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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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말의 신진사대부에 대해 정리한 글입니다.
목차
1)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대두 배경
2) 사대부(士大夫)의 성격과 시기구분
3)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성장
본문내용
1)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대두 배경
무신(武臣)란(亂) 이후 고려(高麗)의 지배(地排)세력(勢力)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樣相)을 보여준다. 무신(武臣)들이 정권(政權)을 잡게 되면서 몰락(沒落)의 길을 걷게 된 전기(前期)의 문벌(門閥)귀족(貴族)들 중 일부는 그 위세를 잃고 무인(武人)세력(勢力) 밑에서 가문(家門)의 명맥(命脈)을 유지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한미한 가문(家門)출신(出身)의 신진(新進)관료(官僚)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무신(武臣)정권(政權)이 확립되는 최씨집권기에는 무신(武臣)에 대한 견제와 아울러 문신(文臣)을 다시 등용(登用)하기 시작하였고, ‘능문능리(能文能吏)’의 관리가 요구되었다. 문관(文官)은 행정실무인 이무(吏務)의 경력을 쌓아야하고 그 바탕위에서 정무(政務)를 담당해 갈 수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문과 리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고 상보적인 관계라 하겠다.
무신(武臣)란(亂) 이후 문인(文人) 지식층(知識層)의 동향을 보면, 무신(武臣)정권(政權)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현 정권(政權) 밖에서 자기의 주체성(主體性)을 지키면서 청고(淸高)한 일생을 산 사람들과 무신정권에 참여하여 현실에서의 영달(榮達)을 구한 사람들로 대별된다. 신진관인(新進官人)으로 성장하는 부류 중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지방의 향리(鄕吏)계층은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고려(高麗) 후기의 과거(科擧)합격자수는 하삼도(下三道)출신(出身)자(者)가 많았는데, 이는 연해지 및 저지개간의 성행과 함께 농업(農業)기술의 발전에 따라 하삼도(下三道)지역 지방(地方)세력(勢力)의 경제력의 성장과도 연계시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고려(高麗)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성리학(性理學)에 관심을 갖고 13세기 말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데 특히 원에 왕래하며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사대부(士大夫)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와 함께 14세기에는 과거(科擧)의 과목(科目)에서 사서가 더욱 중시되었다. 즉, 지방(地方)의 향리(鄕吏)층은 신진관인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14세기 중엽에는 정치적(政治的) ․ 사회적(社會的) 기반을 확대시키고 지속적으로 성장 ․ 발전하여 새로운 정권(政權)담당자로서의 사대부(士大夫)계급을 형성하는 태반이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