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말여초의 사회변동과 중세사회로의 발전
- 최초 등록일
- 2007.11.04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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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 사회에서 고려가 중세사회로 발전하는 과정과 사회적 변동을 살펴보았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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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비록 반쪽짜리 통일이지만, 삼국을 통일하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며, 황금기를 이룩하던 신라사회는 결국 사회가 내재하고 있던 모순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불거져 나오는 사회적 혼란을 겪으며,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했다.
신라사회의 특징이라면, 일단 골품제의 폐쇄적인 사회를 들 수 있겠다. 골품제는 신분에 따라 관직, 토지, 노비수, 심지어 집의 크기까지 결정되었으며, 중위제로 인해 신분 상승을 막아버려 상위 집권층 혼자 권력을 독차지하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골품제의 변화는 신라의 발전과 함께 야기되기 시작했다. 왕의 자손은 세대수에 제한 없이 진골이 되었고, 구야국의 구형왕과 그 후손 김유신의 자손들도 진골로 편입되어 진골 귀족은 포화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마땅히 진골 귀족을 뒷받침해야 할 부는 진골귀족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고,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본디 노예제 사회인 신라는 화려한 귀족문화를 꽃피우며 생겨난 급격한 소비를 노예노동을 통한 착취로 메워나가고 있었다. 신라는 생산의 중심이 노예였고, 지배층의 수요 이상으로 노예가 많아야 햇지만, 갈수록 노예의 착취는 심해지는 상황에서 노예는 더욱더 줄어들며, 지배층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또한 신라가 통일을 이룩한 후에 피정복민들을 모두 양인화 시켰는데, 이는 대당전쟁에서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포섭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이로 인해 많은 국력을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의 중심인 노예는 크게 늘지 않았다. 또한 귀족들의 토지겸병을 막기 위해 녹읍을 폐지하고, 현물을 주는 관수관급제를 실시했으나 대흉년으로 인한 양인들의 몰락과 토지부족으로 인해 녹읍을 부활하고, 이로 귀족들의 토지 겸병을 위한 경쟁은 늘어갔다. 영토 또한 대동강 이남에 한정되었는데다 그나마도 북쪽지방은 수도인 경주와 거리가 멀어 통치에 어려움이 많았다. 결론적으로 진골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진골을 받쳐줄 공급은 부족했다. 그로인해 진골 내부의 잡아먹기 경쟁이 심화되었다.
성골 소멸 후, 태종무열왕을 시작으로 진골이 왕위를 세습하게된 환경은 혼란속에서 많은 수의 진골귀족들이 특권을 위해 왕위계승전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96각간의 난’을 시작으로 왕권 다툼이 일어났고, 진골 내부에선 혈족 관념의 분지화가 일어나 같은 진골에서도 가계에 따라 분열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혜공왕의 피살과 함께 약화된 왕권과 부의 증가율보다 빠른 집권층의 증가는 이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또한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난 집권층들은 지방으로 밀려나게 되고, 거기서 중앙이 약회된 틈을 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고, 많은 지방세력의 할거는 신라의 분열을 촉진해 후삼국시대를 여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신라멸망의 신호탄이 되었다
참고 자료
한국사통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