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변천사
- 최초 등록일
- 2007.11.14
- 최종 저작일
- 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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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영화의 변천사에 관한 리포트
목차
1. 영화의 전래와 초창기 상영관
2. 무성영화의 전성기와 나운규의 <아리랑>
3. 카프의 영화와 영화운동
4. 해방기의 한국영화 (1945~1950)
5. 동란기의 한국영화 (한국전쟁과 영화기술 인력의 향상)
본문내용
※ 한국영화의 변천사 ※
1. 영화의 전래와 초창기 상영관
조선에 처음으로 영화가 들어온 시기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객관적인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문(동대문)내 전기회사 기계창’을 통해 설행(設行)한다는 기사가 실린 1903년의 황성신문을 통해서이다. 이후 이 동대문 내 프랑스인 마전(馬田)이 운영하던 신문(서대문) 밖 벽돌집(1907~ )이 문을 열었다. 당시 상영되었던 활동사진은 해외의 풍물을 찍은 단편들의 묶음이었는데, 관련 기사들을 보면, 대략 한 시간 가량 상영되었고, 이후에는 조선인들의 구미에 맞는 창이나 무용, 연주가 곁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상영은 저녁에만 이루어졌으며(하오 8시부터), 공간은 상등석과 중등석으로 나누어졌고, 아동에 대한 할인이 이루어졌다.
활동사진이 보급되면서, 동대문 내 전기회사 활동사진소와 서대문 외 양옥과 같이 주로 활동사진을 흥행하던 공간과 함께 연극장에서의 활동사진 흥행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예컨대 구극을 중심으로 흥행하던 광무대와 단성사가 1909년 경에는 활동사진을 상영하고 있음을 당시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개인들이나 단체들을 통한 활동사진의 상영회가 잇따랐는데, 이미 1905년에 평양 대동학교의 설립자 김석윤이 학교의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일본에서 직접 활동사진 기계를 사서 학교 내에서 상영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각 부인회나 청년회를 통한 자선 혹은 계몽목적의 활동사진 상영회가 심심찮게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비정규적 형태의 흥행관행은 1910년을 전후하여 정규적인 상설관으로 정착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일본인의 조선 진출이 활발해졌으며, 1910년경에는 경성의 남촌을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거주촌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일본인 관객을 주 대상으로 하여 정기적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상설 영화관들이 1910년대 초반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1910년 2월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했고, 1912년 11월에는 대정관, 1913년 1월에는 황금관이 문을 열었다.
참고 자료
한국영상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