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과 사우
- 최초 등록일
- 2007.11.15
- 최종 저작일
- 2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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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원과 사우의 발생과 역할에 관한 글입니다.
총 13페이지, 글씨 포인트 10, 자간 160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서원(書院)
1) 서원의 발생
2) 서원의 역할
3) 서원의 시설
4) 유명 서원
3. 사우(書院)
1) 사우의 설립
2) 사우의 건립주체
3) 사우의 구성과 배치
4. 맺음말
본문내용
서원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것은 조선 후기였지만 그것이 생겨난 것은 16세기였다. 조선 왕조사에 있어 16세기는 여러 면에서 하나의 전환기였다. 정치적으로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가 흔들려 그 힘을 잃고 있었고, 사회적으로 신분 질서가 흔들려 계층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고 봉건 질서의 빛이 바래고 있었다.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사림이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나타났고 그들 중심의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이 제시되었다.
서원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사림들이 학문의 장, 교육의 장을 명분으로 하면서 실제로는 세력 결집의 장을 확보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 관학의 부진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이 유교를 지도 이념으로 내세운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곧 유교는 신분적 명분론에 의해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지어미, 양반과 상민, 주인과 노비 사이에 지배 질서를 부여한다. 따라서 유교 정치는 유교적인 윤리관을 기본으로 삼는 윤리 정치를 이상으로 내세워 그에 따른 사회 질서의 확립을 위해 성균관, 학당, 향교 등 관학 교육을 강화하고 유학서적, 유교 의례서 등의 보급에 힘썼다.
관학 교육이 정비된 것은 세종 때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때부터 관학 교육 체계에 이상한 조짐을 보인다. 관학이 출세 도구로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향교의 교관은 질이 크게 저하되었으며 더구나 세조의 집정으로 양식 있는 선비들이 관학 교육에의 참여를 기피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균관, 향교 등 관학은 생도가 미달하였고 그나마 남아있는 생도는 대개 학문에는 뜻이 없고 벼슬에나 관심이 있는 무능하고 부패한 무리들이었다.
관학의 부진은 16세기에 이르러 극한 상황에까지 이른다. 연산군은 성균관을 연회 장소로 사용하였고 학자들의 독서를 금하기조차 하였다. 이 때문에 관학은 극도로 퇴락해 갔고 공부할 것을 찾아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따라서 참교육의 장이 요청되었으며 덕망 있는 스승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원이 생겨났으므로 그 뒤 서원은 쉽게 교육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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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민, 『한국의 유교건축』발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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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대학교 전통문화콘텐츠연구소,『한국의 경기지역 서원』국학자료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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