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 정치 사회 변천 과정
- 최초 등록일
- 2007.11.21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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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69년부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까지의 한국 정치사의 변화 과정을 정리한 자료입니다.
목차
1970년대의 한국 정치 사회(1969~1979.10.26)
박정희의 닉슨 푸대접
정인숙, 그 죽음의 배후
경북고속도로 개통
북한 존재를 인정한 8.15선언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정권을 훔친 박정희
공화당 4인체제의 몰락
‘10․15 위수령’과 ‘12․6 국가비상사태’
닉슨의 중공 방문과 남북적십자회담
7․4 남북공동성명
‘10월 유신’선포
체제 수호의 파수꾼 ‘유정회’
윤필용 제거와 전두환의 하나회
서울문리대 10․2 시위
중략..
본문내용
1970년대의 한국 정치 사회(1969~1979.10.26)
박정희의 닉슨 푸대접
1960년대 두 번의 대선에서 패배한 닉슨이 개인 자격으로 세계 각국의 수도를 떠돌던 중 1966년 9월 서울에 나타났다. 그 당시 박정희는 닉슨을 직접 만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외무장관을 지냈던 이동원의 설득으로 박정희는 닉슨을 만나기는 했으나 오찬을 한 것도 아닌 커피 한 잔이 전부였다. 닉슨은 이 날의 수모를 기억하였고, 결국 1968년 11월 5일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에 충격을 주었다. 대선에서 승리한 닉슨은 한국정권의 그 어떠한 워싱턴 출입을 금지시켰고, 반년 뒤 박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와 회견에서 제주도를 미국의 군사기지로 내주겠다는 등의 추파를 던짐으로써 닉슨은 못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자신의 휴가 기간을 이용해 고향 근처 샌프란시스코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닉슨의 고향집은 헬기 이착륙장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박정희에게 그 정도의 예우조차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또한 박정희를 만남에 있었어도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속국 대통령 정도로만 인정하였다.
닉슨이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것은 1969년 7월 25일이었다. 그 주요 내용은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그들의 안보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기 바라며 미국이 또다시 월남전과 같은 사태에 말려들지 않도록 협조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 독트린이 의회를 통해 공식화된 건 1970년이었다.
1970년 1월 20일 닉슨은 미국 의회에 대한 일반 교서에서 지금까지의 봉쇄 정책을 폐기하고, 중공과 대화를 시작할 것임을 밝힌 데 이어 2월 18일에는 닉슨 독트린의 정책백서라 할 ‘1970년대의 미국 대외 정책-평화를 위한 새 전략’ 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이른바 미국의 해외 주둔 병력을 삭감하는 요지의 닉슨 독트린을 공식적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현대사 산책, 강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