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인의 사상
- 최초 등록일
- 2007.11.22
- 최종 저작일
- 2007.05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할인쿠폰받기](/images/v4/document/ico_det_coupon.gif)
소개글
왕수인의 생애와 심학, 양명학과 관한 레포트입니다.. 동양철학의 이해 과목 A+ 받았습니다..
목차
1. 왕수인 (王守仁 1472∼1528)
2. 심학 (心學)
3. 왕양명의 사상 (시대적 배경)
4. 양명학(陽明學)
① 심즉리 (心卽理)
② 지행합일 (知行合一)
③ 치양지(致良知)
④ 성즉리설(性卽理)과 심즉리설(心卽理)의 차이점
⑤ 주자학과 양명학의 비교
본문내용
1. 왕수인 (王守仁 1472∼1528)
중국 명대(明代)의 철학자, 관리. 본명은 수인(守仁).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이다.
심성론(心性論)으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철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관리로서 굴곡이 많은 세월을 보내기는 했지만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워,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100여 년에 걸쳐 평화를 누렸다. 양지(良知 :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마음)가 바로 천리(天理 : 세상의 올바른 이치)라는 그의 주장은 12세기에 활약한 성리학자 주희(朱熹)의 "각각의 사물에 그 이치가 있다"라는 주장과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왕양명의 주장은 전통 유교사상과 어긋난다는 인식 때문에 한동안 사학(邪學)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1502년 그는 건강이 나빠져서 양명(陽明) 계곡에서 정양했는데 이때 도가의 도인술(導引術)을 수련한 듯하다. 산둥[山東] 지방의 과거시험을 감독했고 이어 병부주사(兵部主事)가 되었으며, 1505년경부터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몰려들었다. 유교의 성인(聖人)이 되는 데에는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결심이 중요하다고 가르쳤고, 경전을 암송하고 화려한 문장을 써내는 일 등을 비난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그가 인기전술을 쓴다고 매도했으나, 존경받는 학자, 관리였던 잠약수(湛若水) 같은 사람은 그의 학설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친구가 되었다. 1506년 그의 신상에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부패한 환관(宦官) 유근(劉瑾)을 탄핵하다가 투옥된 한 검열관을 옹호하여, 그 자신도 40대의 곤장을 맞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혔다. 그후 구이저우 성[貴州省] 룽창[龍場]의 역승(驛丞)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토착민들과 함께 살았는데 자주 병에 걸렸다. 이 같은 질병과 고독 속에서 36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밤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를 룽창의 大悟라고 함). 즉 천리를 탐구해나가는 데 있어 주자의 이론에 따라 실재하는 사물에서 이(理)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良知) 속에서 그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렇게 하여 왕양명은 12세기의 철학자 육구연(陸九淵)이 처음 주장하기 시작했던 심성론(心性論)을 완성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1509년 왕양명은 또다시 획기적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제창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은 효도를 실제로 행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효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바른 앎이 있어야만 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