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형성과발전
- 최초 등록일
- 2007.11.22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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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의 형성과정(마한과의관계중심으로)
목차
Ⅰ. 머리말
Ⅱ.백제의 건국에 대한 논의
Ⅲ. 백제 시조 전설에 대한 문제
Ⅳ. 백제와 마한과의 관계Ⅴ. 고고학적자료
Ⅵ.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 백제는 B.C 18년에서 A.D 660년까지 한반도 남서부 지역을 점유하고 있던 국가였다. 고구려, 신라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강국이었던 백제는 멀리 중국과 왜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백제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중국사서와『삼국사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그 인식의 차이에 있어서 상이점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두 사서가 공통적으로 기록한 내용은 백제가 마한으로부터 발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른 문제는 배제하더라도 백제의 기원이 마한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반증임이 틀림없다.
본고에서는 백제 건국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고 마한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백제의 국가 형성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백제의 건국에 대한 논의
① 온조왕 중심설 (유이민 집단과 선주 토착 세력의 연합)
: 노중국에 의하면 온조계 집단은 卒本지역에성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위례지역에 정착한 소국이다. 더불어 미추홀에는 비류계 집단이 세운 소국이 있었다. 온조 집단이 한강유역으로 이동하여 왔을 때 이 지역에는 청도기 및 초기 철기 시대 이래로 이미 선주토착 세력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온조 집단은 이러한 선주 토착 세력들과의 관계를 통해 건국을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十臣의 존재인데 건국 설화에는 十臣이 온조와 함께 내려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노중국은 이를 斯盧國의 六村長와 같은 존재로 파악하여 위례지역의 유력한 선주 토착 집단으로 본다. 이와 같은 논지를 통해 온조집단의 건국은 유이민 집단과 十臣으로 표현되는 선주의 10개 읍락이 중심이 된 것으로 본다. 이를 통해 十濟를 건국한다. 十濟의 의미를 통해 건국 과정에서 선주 읍락의 지배 세력들의 세력이 컸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온조집단의 한계성을 드러내준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점은 일설의 伯濟→百濟의 전환이 아닌 十濟→百濟의 단계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노중국은 이 점에 대해 伯濟는 百濟의 표기상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고대 용어 사용에 있어서 음의 동일성을 이용한 방법이 적용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十濟→百濟로의 발전은 초기 백제의 도읍지 이동문제와 결부된다. 이는 하북 위례성→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한 것을 뜻하는 데 이 원인으로 노중국은 온조기 13년조의 내적 문제와 말갈 및 낙랑의 침략에 대비한 외적 문제, 그리고 지리적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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