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 장보고
- 최초 등록일
- 2007.11.27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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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보고에 대해서 쓴 리포트입니다..
좋은 참고 되시기 바랍니다..
목차
Ⅰ. 장보고의 생애
Ⅱ. 시대적 배경
Ⅲ. 장보고의 성공요인
Ⅳ. 장보고의 의의
Ⅴ. 장보고가 현재 우리에게 주는 의미
Ⅵ. 장보고의 한계
Ⅶ. 인물비교
Ⅷ. 장보고 평가
본문내용
장보고에 대한 유년기의 기록은 전혀 없다. 그의 출생 년도나 출생지가 불분명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지금 궁복(弓福)은 섬사람인데, 그의 딸이 어찌 왕실의 배우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왕이 그 말에 따랐다.” 정년이 장보고를 찾아갈 때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은 전쟁에서 깨끗하게 죽느니만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 가서 죽는 것에 비하랴” 라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그의 고향이 바로 청해진이 설치된 완도라고 추측된다.
청년으로 성장한 후 장보고는 정년과 함께 당나라로 향한다. 여기서 그의 출생 년도를 추측할 수 있는 기록에는 무령군 이라는 군단 명이 805년에 처음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직에 오른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805년 이전에는 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당에 건너간 시기는 일단 805년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당시 무령군의 주요 임무는 당 조정에 반기를 든 평로치청의 번수 이사도(李師道)가 이끄는 평로군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장보고는 무령군의 일원으로 평로군 진압전에 참전하여 819년 이사도의 평로지청 토벌에 큰 공을 세우고 그 전공을 인정받아 무령군 소장직에 오른다.
그러나 곧 군을 떠나고, 장보고는 827년까지 8년간 재당신라인 자치기구인 신라소의 제 1대사 등을 맡으며 당나라에서의 신라 사회를 결집시키며 행정 조직을 이끌었다. 그리고 824년경 무역 시찰차 일본 지쿠젠 지방에 다녀왔고, 825년경에 적산 법화원을 창건하고 무역활동에 종사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828년에 장보고는 신라에 귀국하여 당시 신라의 왕인 흥덕왕에게 청해진 건설을 청원해서 왕의 승인을 받고 ‘청해진 대사’라는 특별한 명칭을 부여 받았다. 이 후 장보고는 청해진(완도)를 중심으로 대당매물사(大唐買物使)라는 독자적인 무역사절단을 파견하면서 교역활동을 하였다. 836년 12월에 흥덕왕이 죽고나서 김양과 김우징 사이에서 왕위다툼이 벌어지고 김우징은 아들과 함께 장보고가 있는 청해진으로 도망을 간다.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해주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겠다는 제안을 하고 이에 장보고가 동의하여 839년에 경주로 쳐들어가서 민애왕(김양)을 제거하고, 김우징을 왕에 오르게 했는데, 그가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장보고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로 봉하고 식읍 2천 호를 주었다
참고 자료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윤명철 학연문화사 2002)
해신, 글로벌전략가 장보고 심포지엄(한국무역협회/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삼성경제연구소2005)
장보고 연구논총(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2005)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편저 최광식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2년)
장보고와 청해진(손보기, 혜안 1996년)
장보고와 황해 해상무역 (허일외 국학자료원 2001년)
세계인 장보고와 지구촌 경영(최민자 범한 2003년)
장보고 사이버무역아카데미 설립방안 연구(황상석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