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동학농민전쟁
- 최초 등록일
- 2007.11.30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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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894년 동학농민전쟁 혹은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리포트
목차
1. 동학의 사상과 배경
2. 동학 교단의 발전과 교조신원 운동
3.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4. 2차 농민전쟁
5.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점
6.동학농민운동과 태평천국운동
* 전봉준에 대하여
본문내용
1. 동학의 사상과 배경
(1) 동학의 배경
1) 대외적 요인 : 19세기 이후 서세동점의 민족적 위협 속에서 국가보위 의식의 팽배와 국난 극복의 민족 구원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2) 정치적 요인 : 18세기 이후 변질된 조선 왕조 양반 사회의 제반 봉건적 정치 상황의 모순으로 새로운 정치 질서와 생존의 체계적인 운수의 전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3) 사회·경제적 요인 : 국가에의 납세 제도인 삼정의 문란, 각종 재해로 인하여 주술적인 행위들이 유행하면서 동학이 하나의 종교로 굳어져갔다.
4) 사상적 요인 : 전통적인 유교·불교·도교 등의 종교의 폐단과 지도 이념의 사상적 퇴색과 민중의 향방의 혼돈 그리고 서학(천주교)의 도전을 민족적 주체 자립의식으로 응전하려는 자세 속에서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2) 동학의 창시자와 창립
1) 창시자 : 최제우
본관 경주. 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제선(濟宣). 어려서부터 경사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44년(헌종 10)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 유곡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1856년(철종 7) 천성산 내원암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다시 경주 용담정에서 수도한 끝에,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천·인을 대도의 근원으로, 성·경·신을 도행의 본체로, 수심정기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라 하고,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2년 도수사 · 권학가를 짓고 동학론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를 설치하고 접주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4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을 북접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64년(고종 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에서 순도하였다. 1907년(융희 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