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석탑
- 최초 등록일
- 2007.12.05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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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에 의해 수용된 불교는 백제와 신라로 전파된 이래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으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이데올로기를 형성함으로써 정치적 안정과 국력의 신장을 가져왔고, 문화적으로는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불교문화가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불교문화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독특한 면이 있는데 석제를 사용한 조형물이 많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석탑을 비롯해 석불, 석등, 부도 등 많은 조형물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같은 불교의 문화권인 인도나 중국,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탑파에 있어서 석탑이란 새로운 형식을 탄생 발전시켜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로 불리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불교의 융성과 함께 많은 수의 탑이 건립되었다. 백제시대의 사택지적비에 “옥으로 보탑을 조성하였다.”와 “절과 탑이 매우 많았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에 경주에 “사찰이 별과 같이 늘어섰고, 탑과 탑은 기러기가 날아가는 듯하다.”라는 기록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특히 신라의 석탑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넘어가면서 뿌렷한 양식의 변화를 보이는데 아래에서 삼국시대 속의 신라석탑과 통일 후 신라석탑을 살펴보겠다.
목차
서론
본론
1. 삼국시대의 신라석탑
2.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1) 7세기 석탑(전형양식)
2) 8세기 석탑(정형양식의 정립)
3) 9세기 석탑(정형양식의 전국화)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삼국시대의 신라석탑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한 신라는 백제에 못지않게 불교가 융성하였고, 자연히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탑파의 건립도 활발하였다. 신라 역시 석탑이 건립되기 전에는 목탑이 주종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문헌에 전하는 다수의 목탑과 현존하는 목탑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백제와 같이 석탑 이전에는 목탑이 건립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미륵사지석탑을 건립하던 서기 600년경에 신라 역시 석탑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신라는 선덕여왕 3년(634)에 분황사모전석탑을 건립하면서 기존의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 탑은 안산암을 벽돌과 같이 다듬어 건립해 모전석탑이라 불리는데, 이를 통해 신라석탑은 목탑과 전탑의 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목탑의 양식을 석탑의 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목탑의 양식을 석탑에 재현시킨 반면, 신라는 목탑과 전탑의 양식을 모두 수용해 석탑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양국의 석탑 건립에서 보여주는 차이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륵사지석탑과 분황사모전석탑을 비교해 볼 때 백제는 화강암만을 사용한 반면, 신라는 화강암과 안산암을 혼용하고 있다. 따라서 석탑의 양식 분류상 백제는 ‘석탑’이란 용어를 쓸 수 있지만, 신라에서는 ‘모전석탑’이라는 용어를 붙이고 있다.
둘째, 백제 석탑은 양식적 근원이 목탑에 있음에 비해, 신라 석탑은 기존의 목탑과 중국에서 전래된 전탑의 양식을 혼용해 건립하고 있다.
셋째, 백제는 왕도에서 벗어난 익산 미륵사지에서 석탑을 건립했지만, 신라는 경주 한 복판에 위치한 분황사에서 건립하였다. 그런데 다음에 건립되는 석탑에 있어서는 완전히 반대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부여 한복판에 건립되었음에 비해 탑리오층석탑은 경주에서 떨어진 의성에 건립되었다.
이러한 차이점은 백제와 신라가 지녔던 역사와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건립된 2기의 석탑은 통일 후 건립되는 많은 석탑의 양식면에서 모범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만이 갖는 독특한 석탑문화를 완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 자료
1. 張忠植, 新羅石塔硏究, 一志社, 1987
2. 박경식, 우리나라의 석탑, 역민사, 1999
3. 박경식, 통일신라 석조미술 연구, 학연문화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