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의 침입과 고려의 대응
- 최초 등록일
- 2007.12.08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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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사학
한국중세사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대몽 항쟁
1) 몽고침입의 배경
① 저고여 살해 사건
2) 몽고의 1차 침입
3) 무신정권의 강화도 천도
① 강화도 천도 배경
4) 몽고군의 계속되는 침입
5) 강도 정부의 출륙과 삼별초의 항전
2. 몽고가 고려에 미친 영향
1) 6차에 걸친 전쟁(1231~1259)을 통해서
2) 삼별초의 항몽투쟁을 통해서
3. 몽고의 침입에 대한 고려의 대응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Ⅲ. 결 론
본문내용
Ⅰ. 서 론
몽고는 13세기 초엽에 칭기즈 칸이 출현하면서 분열된 부족의 통일을 이루어 광대한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유라시아 구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하는 전쟁과정에서 1231~59년 고려에 대한 침략을 진행하였다. 약 30년 동안 계속된 침략은 대략 6차례나 되었다. 최초의 침략은 1231년이었고, 이후 1232년에 2차, 1235~39년에 3차, 1247년에 4차, 1253년에 5차, 1254~59년에 6차의 침입이 있었다.
몽고가 고려를 침략한 직접적인 이유는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유역에서 피살된 것이 침략의 구실이 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몽고족이 기마유목민족이기 때문이다. 기마족은 끊임없이 남하하려는 속성이 있어서 중국역대왕조도 북방유목민족이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세우는 등 골머리를 앓았으며 때로는 그들에게 정복되어 이민족 왕조가 세워지기도 했다. 기마족의 본질적 특성은 정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약탈경제이다. 물자가 부족해지면 자기들 스스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농경민족을 약탈해서 보충한다. 몽고가 고려를 정복하고 수많은 공물과 사람들을 수탈해 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고자 최씨 무신 정권은 송악에서 강도(강화도)로 서울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꾀하였다. 지방의 주현민들에게는 산성이나 바다의 섬으로 들어가서 오랜 전쟁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은 산성과 섬에서의 생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되었으므로 일반 백성들은 몽고의 침략에 자력으로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일반 백성들이 각지에서 몽고군을 경퇴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충주 다인철소, 처인 부곡의 승리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몽고군은 이르는 곳마다 살육을 자행하였으므로 백성들은 막대한 희생을 당하였고,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굶어 죽는 일이 많았다. 전쟁이 종료되어 원과 강화를 맺은 뒤에 원의 간섭과 원을 따르는 정치 세력에 의하여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일반 백성이었다.
참고 자료
『역동적 고려사』, 이윤섭 지음, 필맥, 2004
『교양 한국사』, 이덕일 지음, 휴머니스트, 2001
『청소년이 읽는 한국사』, 박문영 김경찬 지음, (도)동해, 2000
『한반도와 동아시아세계』, 김승일 이은우 지음, (주)지식마당, 2002
『몽골의 침략과 30년 항쟁』, 이이화 지음, 한길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