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광해군의 치적, 실정을 논하고, 그에 따른 저의 평가를 썼습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가. 광해군의 삶
나. 어려운 상황에서 이룩한 그의 공적.
ⅰ) 분조
ⅱ) 전후 복구 사업과 파 당화
ⅲ) 실리 외교 정책
다. 이유가 있는 그의 과실들...
ⅰ) 폐모살제
ⅱ) 무리한 토목 사업
ⅲ) 은혜를 저버리다.
라. 평가
Ⅲ. 결 론
본문내용
Ⅰ. 서 론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인물을 평가하는 데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그런데, 어떤 기준에 따라서 내려진 평가는 수 백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이런 잘못된 평가 속에 묻혀 진 역사 속의 인물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최근에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 한 조사에서 ‘다시 재평가 되어야 하는 인물’에서 1위로 광해군이 선정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현재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여러 나라와 외교적으로 복잡한 관계이지만, 외교적으로 제대로 해결을 못할뿐더러 힘이 없다. 이러한 처지를 반영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광해군이라는 인물을 볼 때, 그는 명이 망하고 청이 부강하고 있는 시점에서 중립 외교, 실리 외교로써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몇 안 되는 군주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한 재평가가 불거지는 것이다.
필자 또한, 광해군의 일생과, 그의 공적, 실정에 대해 조사한 후 그에 대하여 재평가하겠다.
Ⅱ. 본 론
가. 광해군의 생애와 업적
광해군은 조선 15대 임금(재위 1608~1623)으로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며,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의인왕후에게 아들이 없자, 공빈 김씨의 첫째 아들인 임해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성격이 포악하다고 하여 하지 않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분조를 설치하였고, 그 뒤 7개월 동안 함경도,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군량미의 조달 등으로 난의 수습을 위해 힘썼다.
1594년 윤근수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였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으나,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1606년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小北)파 유영경도 적통론을 내세워 선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상황의 반전으로 유영경은 주살 죄를 물어 죽임.
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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