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정치/일본역사]일본 역대 수상 조사 - 무라야마 도미이치(토미이치)(村山富一)/일본 과거사 사죄
- 최초 등록일
- 2007.12.14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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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 역대 수상을 조사하는 수업에서 발표자료로 썼던 리포트입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수상을 역임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에 대한
조사 자료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연결해서 서술했습니다.
일본의 과거사를 최초로 공식 사죄했다고 하는 수상으로서 관련 내용도 있습니다.
목차
*약력
*위원장~연립정권의 수립
*나폴리 서미트
*미·일 안보조약 유지(견지)
*이어지는 사건과 사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기금
*무라야마 담화
*일화
*저서/논문/영화
본문내용
☀ 정계 입문 전까지
무라야마가 총리가 되었을 때, <오이타의 폐가>라는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생가를 방문해 보면, 훌륭한 집은 아니지만 그렇게 불릴 만큼 심하게 오래되거나 지저분하지는 않고, 단지 보통의 서민 가정일 뿐이다.
무라야마는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도쿄에서 주경야독으로 공부하여 1942년 메이지대학에 진학했다. 귀향하여 자치로(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의 직원이 되어, 1955년에는 오이타시 의회, 1963년에는 현 의회, 1972년에는 대의사가 되었다.
이 무렵, 오이타는 새로운 산업도시로서 발전하고 있었지만, 공해문제와 매립 반대운동으로 시끄러웠다. 히라마츠 모리히코가 지사가 되어 <일촌일품운동(一村一品運動)>으로 활기를 띄는 것은 이후의 이야기로, 지방의 특성상 여러 의견이 자주 충돌했는데 그 안에서 조정역으로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한편, 이 때 무라야마의 부인이 현청의 직원식당을 경영함으로서 지지층을 확보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1991년 국회대책위원장으로 취임.
1993년 9월 25일 일본사회당 위원장으로 취임.
1994년 6월 29일 중의원에서 수반으로 지명되어 결선투표 끝에 가이후 도시키를 꺾고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됨에 따라, 자민-사회-사키가케 연립내각이 발족.
☀ 위원장~연립정권의 수립
1991년 타나베 마코토 위원장을 이어 국회대책위원장이 되었다. 무라야마는 자민당의 카지야마 세이로쿠, 공명당의 칸자키 타케노리 등과 신임관계를 맺었다. 1993년에는, 야마하나 사다오 위원장이 호소카와 정권의 정치개혁담당상에 취임하여 당무를 돌보기 어려워져, 무라야마가 이를 대신하여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
1994년 하다 쓰토무의 사회당을 배제한 신당 구상에 격노해 연립정권에서 이탈했지만, 당 내에서 연립 잔류파와 이탈파가 대립하였다. 6월 24일 하다 내각이 총사직하고,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가 사회당 위원장을 수반으로 해 자민-사회-사키가케 3당 연립정권의 수립 의사를 타진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