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제국 질서의 동요
- 최초 등록일
- 2007.12.14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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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화제국 질서의 동요
발표했던 자료 입니다.
목차
1.머리말
1860~1870년대 邊境의 위기와 대응논의
1. 1860년대의 新外交와 그 한계.
2. 일본의 접근과 臺灣事件
3. 西北․西南의 回亂과 英․露의 변경압박
4. 대응논의의 分岐
본문내용
중국인의 뿌리깊은 중화사상(中華思想)과 그 위에 기초한 중화제국(中華帝國)의 세계질서는 19세기 중반 서구인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점증하는 도전에 직면하게된다. 강력한 무력을 앞세운 열강의 압박이 세계의 중심임을 자부해온 중국에게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면서 전통적 정치질서의 재을 불가피하게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인의 새로운 국제관계와 정세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대되고 전통적인 세계관의 조정과 변용이 서서히 진행되게 된다.
그러나 전통적 세계관과 정치질서가 문화적안 우월성의 확산에 근거한 오랜 역사적 배경을 지닌만큼 그것의 조정과 변용은 한편에서 강한 저항에 직면하면서 매우 완만하게 진행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대외적인 위기가 더욱 가중되게 된다. 그리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해 온 중국의 국제 정치 질서에서의 위치가 거듭 실추되고 이른바 `중화제국의 체제`가 현저한 동요를 보이게 된다.
제 1․2차 중영전쟁(中英戰爭)을 통해 서구 열강의 무력의 우위가 점차 드러나는 가운데, 특히 1860년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은 태평천국(太平天國)과 염군(捻軍)의 대반란이라는 대내적인 분위기와 중첩되어 청조 지배층에 강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서구와의 적극적인 관계개선을 표방한 서태후(西太后)정권이 출현하고, 총리각국통상사무아문(總理各國通商事務衙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외교관계가 전개되면서 서구의 군비를 도입하고 군사공업과 관련 산업기술을 수용하기 위한 양무운동이 적극 추진되게 된다.
그러나 한편 1960년대 중반 이후 국내의 대반란세력이 점차 평정되고, 대외관계도 잠정적이나마 크게 호전됨에 따라, 이른바 미증유의 위기를 딛고 왕조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는 ‘중흥(中興)’의식이 등장하면서 외세와의 강경한 대결을 요구하는 언론들이 흥기하는 경향도 부각된다. 그런데 1870년대부터는 중국을 둘러싼 조공국들의 ‘울타리’가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이 강화되면서 서서히 흔들리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종래 중화제국체제내에서 중요한 조공국으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유구(琉球), 월남, 조선 등이 외부의 압박에 의해 차례로 중국의 지배권에서 이탈하게 되고, 결국은 중국 자체 및 그 문명의 붕괴와 해체의 위기에까지 직면하게 된다. 그리하여 특히 청일 전쟁 후에는 구래의 중화제국체제가 결정적인 붕괴의 단계에 들어서면서, 민족적․문화적 위기의식이 확대되어 이후 새로운 질서의 모색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중화제국질서의 동요과정은 양무운동의 시기와 중첩되는 중국근대사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그 과정에서으 획기들을 중심으로 그 구체적인 양상을 개관하면서 그에 대한 대응노력과 그 결과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