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의 `감자`-사회 윤리주의 비평 [‘부르조아’식 몰락한 농민의 리얼리즘]
- 최초 등록일
- 2007.12.16
- 최종 저작일
- 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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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동인 "감자"의 사회 윤리주의 비평
길지 않고 핵심만 넣은 알찬내용의 5페이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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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감자>는 1925년 1월 [조선신문]에 발표된 작품으로 김동인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이 그의 대표자품으로 꼽히는 이유는 뛰어난 소설 형식을 갖추고 있음에 연유하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가장 동인다운 면모를 보인다는 점에 있다.
김동인이 <감자>를 발표 할 당시 일제의 통치가 한창이었고 산미증식계획 등으로 농민들은 식량부족으로 몰락해가고 점점 더 배고프고 가난해져갔다. 그 몰락해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김동인은 환경결정론을 도입한 주인공 ‘복녀’의 모습을 통해 노골적으로 보여주고있다.
김동인이 평양 갑부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놀러다니기도 하여 문단에서는 김동인이 도쿄를 산보다니듯 한다 하여 `동인식 동경산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렇게 김동인이 동경산보를 다니던 일제는 1920년대에 이르러 통치방침을 바꿨다. 소위 `문화정치`는 표면적으로는 조선 민족에게 식민 지배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치권과 참정권, 문화활동 등을 허용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분열과 경제 수탈 및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자 하였다. 3·1만세운동 이후 항일 민족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아 국내외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만주·연해주지역에서는 독립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이념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전파되면서 사회·경제운동을 활성화시켰다. 그리하여 노동운동·농민운동·청년운동·학생운동·여성운동·형평운동 등 대중운동도 급속히 확산되었다. 조선 농민과 노동자들은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로써 일제의 착취에 대항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단장을 짚고 백금 물부리에 멋진 양복장이 신사였던 김동인의 생활은 차츰 빈곤을 향해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한다. 평양에서 가장 컸던 400평 규모의 커다란 저택을 팔게 되었고, 재산은 깨진 항아리의 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생활상의 변화는 우울증 등 신경증의 병마를 가져다 주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수면제, 최면제 등을 과다복용함으로써 나중에는 마약까지 손대기 시작하여, 중년 이후에는 약물중독에 의한 병마에 마지막까지 시달려야만 했다. 거기다가 아내 김혜인마저 가출하여 그의 곁을 떠나 버리는 가정파탄이 그를 엄습하였다. 경제적 파산과 가장파탄의 이중적 고통이 그의 삶을 뿌리채 파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김윤식, <김동인 연구>, 민음사, 2000
박현호, <식민지 근대성과 소설의 양식>, 소명출판, 2004
양은창, <한국소설의 이해와 감상>, 청동거울, 2003
이기동, <한국단편소설>, 파라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