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동묘에 관한 리포트로
문화유적시간에 작성했던 리포트입니다.
참고로 A뿔 받은 리포트구요!
동묘에 대해서 상세히 서술하였구요~ 사진도 참조하였습니다.
목차
1. 머리말
2. 동묘의 역사
3. 동묘의 입지와 배치
4. 동묘의 제례
5. 동묘의 건물
6. 맺음말
본문내용
관왕묘, 즉 관우의 묘는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하며 그의 충(忠), 용(勇), 인(仁), 의(義)에 따른 훌륭한 공적을 후세의 제왕들이 존경하여 작위를 내리고 신격화함에서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관우는 관성제군(關聖帝君)·관보살(關菩薩)이라고도 하며, 무운(武運)과 재운(財運)의 수호신으로서 중국인의 신앙 대상이었고, 당(唐)나라 중기부터 무신(武神)으로서 관제(官祭)의 하나가 되었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타타르를 정벌하였을 때,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대만(臺灣)에 있던 명나라 유신(遺臣)의 폭동을 진압하려 하였을 때, 영험이 있었기 때문에 왕조의 존경과 숭상이 더욱 두터워지면서, 관우는 신성불가침의 우상이 되어 각지에 그를 모시는 사당인 관제묘[關帝廟, 무묘(武廟)]를 세웠다. 또한 재신(財神)으로서 숭배된 것은 관우가 위(魏)나라의 조조(曹操)에게 잡혔을 때, 조조가 그에게 상마금(上馬金), 하마은(下馬銀) 등의 푸짐한 상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퇴하고 촉나라 유비(劉備)에게로 돌아갔다는 고사에 따른 것이며, 도교(道敎)에서도 관우를 사후세계의 유력한 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렇듯,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공자(孔子)의 문묘(文廟)처럼 무묘(武廟)를 세워 관우를 숭배해 왔으며, 우리나라에서 관왕묘(關王廟)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했던 명나라 장수들의 요구와 명조(明朝)의 정치적 의도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동묘는 임진왜란 때 관우의 영이 왜병을 격퇴시키는 데 도와주었다 하여 명의 사신 만세덕(萬世德)이 신종(神宗)의 요청을 전해와 1601년(선조 34)에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서울의 남쪽과 동쪽에 관왕묘가 세워졌고, 한말에는 관제신앙(關帝信仰)이 고조되어 서울의 서, 북에도 관왕묘가 세워졌다. 그러나 북묘는 1908년에, 서묘는 1909년에 동묘에 합사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현재 동묘의 정전내부에는 여러 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남묘는 1899년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으나 다시금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1957년 다시 재건되었다가 지금은 동작구 사당동으로 이건 되었다.
참고 자료
허 승, 「동묘의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蔚山大 大學院』, 1992.
손숙경,「19세기 후반 관왕 숭배의 확산과 관왕묘 제례의 주도권을 둘러싼 동래 지역사회의 동향 」,『한국고문서학회』, 2003.
장장식,「서울의 관왕묘 건치와 관우신앙의 양상」,『민속학연구』14, 2004.
국립문화재연구소,『동묘의 건축』, 국립문화재연구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