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민란 배경, 민란의 전개, 홍경래의 난, 제주도민의 반란, 진주 민란, 갑오농민전쟁, 민란의 역사적 의의
- 최초 등록일
- 2008.01.03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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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목차
1. 민란의 발생 배경
1) 천주교 탄압과 외척의 세도
2) 부정부패와 삼정의 문란
3) 봉건사회 체제의 모순
4) 농민의식의 성장
2. 민란의 전개
1) 농민 반란의 신호탄
2) 홍경래의 난
3) 제주도민의 반란
4) 진주 민란
5) 갑오농민전쟁
3. 민란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1. 민란의 발생 배경
1) 천주교 탄압과 외척의 세도
천주교는 비록 드러내 놓고 믿거나 포교할 수는 없었으나 정조 임금의 비교적 관대한 정책으로 교세가 점점 커져 갔다. 정조 18년인 1794년 12월에 조정에서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 통역관으로 따라가는 지황(池璜), 윤유일(尹有一), 최인길(崔仁吉)등의 천주교 신자를 통해 북경의 남천주교당에 연락을 할 수가 있었다. 남천주교당에서도 이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模)를 조선에 보내기로 하였다. 그해 5월안국동 강과부 집에 모여 예배를 보고 있던 중 김여삼의 밀고로 인해 포리들이 들이닥쳤다. 주문모는 탈출하였으나 지황, 윤유일, 최인길 등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 이후에도 서학을 금해야 한다는 상소가 여러 번 있었으나 정조의 관용으로 조선의 천주교 신자는 약 4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중략)
2) 부정부패와 삼정의 문란
19세기의 권력의 독점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독점 현상으로 연결되었다.
첫째로, 양반들에게만 개방되어 있던 관리 등용의 실상을 알아보자. 조선조의 관리 등용은 대개 과거를 통해 이루어졌다. 직접 실력을 겨루어 경쟁에 뽑히는 과거가 공정하다면 거기에 걸맞는 재주꾼이나 능력자가 뽑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부정으로 저질러지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과거 부저의 논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였다. 문과의 경우 서울의 세도가나 부호들은 담당자를 매수하여 종을 데리고 가서 시제가 노아면 종은 재빨리 바깥으로 연락하여 그 제목에 따른 다른 사람이 글을 지어 준다. 또 미리 시제를 알아내어 남이 지어 준 글을 외워 과거장에서 써 낸다. 또 다른 경우는 글 잘 하는 선비를 매수하여 그 선비가 쓴 글을 베껴 내고 그 선비는 쓴 글을 찢어 버린다. 홍경래도 과거를 보다가 이런 부정을 보았고 그가 남에게 써준 글을 낸 자가 합격하기도 했다.
무과의 경우는 더욱 문란했다. 향시에서는 뇌물이 판을 쳐 실제 수십 명 또는 수백 명만이 합격할 수 있는데도 수천 명․ 수만 명의 합격자를 냈다.
둘째, 음직(蔭職)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대대로 벼슬을 누린 문벌에게만 해당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계속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본문 중)
참고 자료
『우리나라 역사』, 이이화, 1987, 驪江출판사.
『이야기 한국사 7-민란과 외세의 압박』, 이야기 한국사 편찬회 엮음, 1986, 풀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