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본관제도와 변화
- 최초 등록일
- 2008.01.08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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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본관제도의 그 변화상
목차
▣ 본관이란 무엇인가?
▣ 본관제란 무엇인가?
▣ 본관제의 변화
▣ 결론
본문내용
8세기 이후, 신라(新羅)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진골(眞骨) 귀족들 간의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졌다. 150년 동안 20여 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이렇게 사회가 혼란해지자 지방에서는 호족(豪族)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城主) 혹은 장군(將軍)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지배력도 행사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고려(高麗) 건국에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그가 베풀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우대했다. 하지만 후삼국(後三國) 통일 이후 이들은 왕권(王權)을 위협하는 존재로 변하고 만다. 결국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고단수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근간이 되었던 것이 바로 본관제(本貫制)이다.
▣ 본관이란 무엇인가?
본관이란 관향(貫鄕)·향적(鄕籍)·선향(先鄕)·본(本)·관(貫)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혈연·지연에 매여 살고 있는데, 성이 부계(父系)의 연결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본관은 그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성과 본관이 동일해야 같은 혈연으로 볼 수 있다.
본관의 명명(命名)은 시조(始祖) 혹은 중시조의 출신지 또는 씨족의 세거지(世居地)를 근거로 호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국가의 공신이나 귀화인에게 포상의 의미로 국왕이 본관을 하사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사성이라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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