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인물연구(낭가사상,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조선혁명선언, 독사신론 내용연구)
- 최초 등록일
- 2008.01.16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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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 역사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위대한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선생의 삶과 철학을
그의 저서와 일화등을 통해서 평해보는 글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이런 단재의 대륙적인 사고방식은 고구려의 북진정책이나 고려가 계승해서 여초에 추진했던 북진정책의 기상을 높이사는 것을 보면 알수있는데,
신채호는 저서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평가하기로
“1천년래의 1대사건”이라하며 그의 북진정책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신채호의『조선사연구초』中
「그러면 조선 근세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나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은 무슨 사건에 원인하는 것인가. ........ 나는 한마디 말로 회답하여 말하기를 고려 인종 13년 서경(평양)천도 운동, 즉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으로 생각한다. ....... 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가 반란한 적을 진압한 것으로 알았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이는 단재의 역사철학인 “낭가사상”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단재의 역사인식은 그를 왜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자”라고 부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즉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단재 신채호는 상고사에 대한 연구를 독립투쟁의 당위성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적극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우리민족은 중세와 근세의 우리민족에 비해서 더욱 독립적이었으며 강성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부각시키고 또한 외세의 침략에 당당히 맞서 결국 독립된 민족국가의 위치를 지켰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민족주의 및 자긍심을 길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도 자연히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민족투쟁의 동기부여로서 적절하였고 이러한 역할은 단재 신채호처럼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독사신론
조선혁명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