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금석문의 자료는 현재 현존하는 것은 거의가 6세기대의 것인데 이 시기 금석문 자료 가운데에서 임신서기석과 울주 천전리서석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지방민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곧 국왕이 등장하고, 건비의 내용이 적힌 국가 차원의 금석문 자료들은 한결같이 그 대상을 지방민으로 하고 있다. 이렇듯 금석문을 통하여 신라시대의 지방민의 삶에 대해 피상적인 사실이 아닌 살아 숨쉬는 실제적인 모습을 통해 알아보고 훗날 지어진 문헌들과 비교해봄으로서 올바른 역사가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I. 서론
II. 본론
1. 금석문이란?
(1) 뜻
(2) 종류
(3) 신라금석문의 특징
2. 신라 금석문의 검토
(1) 영일 냉수리 신라비
(2) 울진 봉평 신라비
(3) 울산 천전리 서석명문
(4) 영천 청제비
(5) 단양 적성비
(6) 명활산성작성비
(7) 안압지출토비
(8) 진흥왕 순수비
(9) 대구 무술 오작비
(10) 남산신성비
(11) 임신서기석
III. 결론
본문내용
위와 같은 내용의 이 비문은 신라융성기에 청소년들의 유교도덕사상과 신라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임신년 6월 신라인 두 화랑이 3년 동안에 국가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서하고 나서, 다시 <시경>, <상서>, <서경>, <예기>, <좌전> 등의 유교경전 공부도 3년 동안에 할 것을 맹서하고 있다. 3년 동안의 맹서는 남산신성비의 서두에도 나온다. 어떤 집단에서 담당했던 남산신성의 부분이 3년 안에 붕괴가 되면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의 맹서가 적혀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학문 연마, 각종 공사를 3년에 책임을 진다고 하늘에 대한 맹서는 신라 사회가 성실한 삶을 영위했음을 짐작케 하며, 이러한 책임성이 있는 사회 분위기는 나아가서 삼국 통일에도 일조를 담당했다고 사료된다.
III. 결론
이상으로 신라 금석문에 대해 그 내용과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았다. 냉수리비를 통해 6부 체제와 갈문왕의 성격에 대해 알 수가 있었고, 봉평비를 통해서는 국왕의 지위 변화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때 국왕은 상대등을 설치하기 이전에는 귀족회의 의장으로서 귀족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는데, 上大等의 설치 후 국왕권이 강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적성비를 통해서는 당시의 지방통치제도, 관등제도, 新영토의 지배방식 뿐만이 아니라, 신라의 율령제도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위의 비문들이 6세기 신라시대의 정치에 관한 것이라면 역역체제에 대해서는 청제비, 작성비, 안압지출토비, 신성비 등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역역체제에 있어서는 주로 지방관을 통하여 국가의 명령을 전달받고 인력동원과 축성공사를 한 것이다.
이 외에도 순수비를 통해 진흥왕이 민심을 수습하고 영역을 확인함으로 새로운 영토에까지 왕의 권력을 펼침으로 왕권신장을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임신서기석을 통해서는 화랑도들의 충, 효 사상과 유교정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금석문은 빈약한 고대사의 자료에 활력소와 같은 존재였다.
참고 자료
주보돈, 금석문과 신라사, 지식산업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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