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
- 최초 등록일
- 2008.02.09
- 최종 저작일
-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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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특무대장 김창룡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김창룡의 생애
2. 김창룡의 숙군작업
3. 김창룡의 업적
4. 김창룡의 용공사건
5. 김창룡의 암살사건
6. 결론
본문내용
1. 김창룡의 생애
김창룡은 1916년 함남 영흥군 요덕면 임상리 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의 현실은 일본 식민통치 하의 암울한 시대였다. 당시 일본은 한민족의 식민지통치에 대한 저항을 폭력적으로 제거하려는 한편 황국 신민으로서 충성을 바치도록 조선인을 동화 시키려는 이중적인 정책을 펴고 있었다.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때 영흥으로 나와 영흥공립농잠 실습학교에서 2년 과정을 마친 김창룡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편창 제사공장에서 직공 생활을 하면서, 일본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이 공장에서부터 일본인 경영자에게 신뢰를 받게 된 그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년만에 만주 장춘역 직원으로 추천 받았다. 김창룡은 만주에서도 또 한 번 그 특유의 충성심과 헌신성으로 일본인의 신임을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다시금 일본인의 소개로 마침내는 북지에 있는 일본 헌병 부대의 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군속이 아닌 진짜 헌병이 되기를 소원했다. 김창룡은 일본 장교의 눈에 들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고, 그 노력의 결과인지 1940년 초 장춘에 있는 관동군 헌병 교습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열성인 김창룡은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일본 보조헌병이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조선과 중국의 항일 조직에 대한 색출 작업이었으며, 그는 일본군에 편입하여 남경, 무창, 한구, 영수를 거쳐 안의에 배속되었고, 그의 임무는 국경 지대의 간첩을 잡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군의 패망으로 1945년 영흥으로 돌아가 도상원과 결혼을 한다. 북한에서 생활이 곤란해진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시절 당시 헌병정보원으로 데리고 다니던 김윤원을 찾아 가지만 그에 고발로 철원 보안서에 수감되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해 11월 5일 함흥 전범 재판소로 이송 중 탈출한 김창룡은 영흥 친척집에 머물게 되다 다시 영흥군 요덕
참고 자료
백선엽,《신록 지리산》, 고려원, 1992.
장창국,《육사졸업생》, 중앙일보사, 1984.
박성환,《파도는 내일도 친다》, 동아일보사, 1965.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한국전쟁사》국방부,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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