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전쟁
- 최초 등록일
- 2008.02.11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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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멕시코전쟁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멕시코전쟁 (1846년)
명백한 운명과 영토의 확장
태평양에서의 상업적인 야망
존 퀸시 아담스(John Q. Adams)의 외교정책
먼로주의(Monroe Doctrine)
미영관계
오레곤문제
본문내용
멕시코전쟁 (1846년)
1846년 2월 3일, 지난 여름 부터 텍사스의 코퍼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에 주둔하고 있던 째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장군에게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선이라고 주장되던 리오그란데(Rio Grande)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작전 계획과 정찰을 실시하는데 몇 주가 소요되었기 때문에, 제1보병여단이 코퍼스 크리스티를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3월 9일이 되어야 가능했다. 미군은 매일 10여 마일을 행군하였고, 도중에 멕시코 기병과 조우하였으나, 수적으로 우세하였던 미군은 그대로 지나칠 수 있었다. 결국 3월 28일 새벽에 테일러의 부대는 목표 지점인 텍사스 준주(몇 달전인 1845년 12월 29일에 미국 영토로 편입되었고, 영토를 획정짓는데 논란이 많았던 땅)의 리오그란데강의 북쪽 둑에 다다를 수 있었다. 진흙투성이의 강 건너 200야드(미터로 고칠 것) 쯤에는 멕시코 요새와 마을이 있었고 거의 3천 여 명 정도의 잘 무장된 멕시코 국경 수비대가 ...(중략)...
명백한 운명과 영토의 확장
‘포크의 전쟁’은 1812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을 지배하였던 팽창주의자들의 지론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전쟁이었다. 테일러 장군의 부대가 미국의 남서부 지역에서 멕시코 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을 때, 대통령은 태평양에 인접한 북서부 지역(오레곤)을 두고 영국과 비밀리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이 협상에서 대통령은 주로 북남부 지역 정치가들의 도움을 받아 1846년 6월, 북위 49도선에서 오레곤을 영국과 양분함으로써 북미에서의 무역과 영토문제를 두고 영국과의 경쟁관계를 잠시 동안 완화시킬 수 있었다. 혁명기의 반 영국적인 정서가 1830년대와 40년대에 여전히 남아있었고, 텍사스와 캘리포니아에서의 영국의 세력 부식이 사실은 멕시코전쟁의 발발 원인이...(중략)...
참고 자료
Wilbur D. Jones, J. Chal Vinson, “British Preparednees,” 364.
John S. Galbraith, “France as a Factor in the Oregon Negotiations,” Pacific Northwest Quarterly, 44 (April 1953), 73.
James O. McCabe, “Arbitration and the Oregon Question,” Canadian History Review, 16 (Dec. 1960), 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