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과학적 업적과 훈민정음의 과학성
- 최초 등록일
- 2008.02.25
- 최종 저작일
- 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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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의 과학적 업적과 훈민정음의 과학성에 대하여 여러 사료적 자료들을 근거로 작성한 리포트 입니다. 각각의 유적과 유물들에 대하여 사진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목차
훈민정음의 과학성
외국 언어 전문가의 평가
참고자료-경향신문 2004. 10. 10
맺음말
본문내용
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하나만으로도 찬양받을 수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지만 한 편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과학입국`의 깃털을 마련한 첫 국가 지도자로 자리 매김한 인물이기도 하다. 과연 훈민정음을 창제한 역사적 인물로, 과학을 사랑했던 지도자로 평가를 받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종대왕은 서기 1397년 5월 15일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방원)의 셋째 아들 로 태어났다. 1418년 8월 10일(음력) 아버지 태종의 내선을 받아 조선 제4대 임금에 올랐다. 세종은 재위 10년 가까이 위민(爲民)정치의 방향을 잡는 데 거의 시간을 다 보 냈다.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해결하고 유교적인 교화를 통해 풍속을 순화시키 는 것이 왕이 해야 할 본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인 방법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세종은 이런 확신 위에 백성들의 배를 불리는 방법으로 중농정책을 추구했다 . 구체적으로는 농업기술 자체의 발전과 수확물에 대한 공평한 과세로 국 정운영의 초점을 모았다. 그의 과학 사랑은 바로 백성을 배불리하겠다는 생각과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농업기술 발전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세종은 먹는 것(食)이 곧 백성의 하늘(民天)이라고 강조하면서 중농정책을 폈다. 그래서 세종은 전국 각지에 부임하는 지방관들에게 백성들로부터 농시(農時)를 빼앗지 말라는 당부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복병은 많았다. 달력을 전적으로 중국에 의존하면서 발생하는 혼선이 너무나 많았던 것. 실제로 관상감 관원들이 날 수 계산을 잘못해 일어나는 소 동도 자주 발생했다. 세종은 그래서 경복궁의 위도를 정확히 측정해 이 위도에서 잰 시각으로 날수 를 계산하는 방법을 확립하기로 했다. 세종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천문과학기술`의 발전이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재위 14년부터 여러 인재들을 동원해 대간의(大簡儀), 소간의(小簡儀) 등 여러 가지 천체 관측기구들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를 통해 경복궁의 위도를 측정한 다음 16년부터는 자격루를 비롯한 시각 측정기구들을 제작하고 24년엔 마침내 `칠정산 내ㆍ외편`의 날 수 계산 법을 완성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