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역사적 의의와 한계
- 최초 등록일
- 2008.03.11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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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갑신정변에 대해 정리한 자료입니다.
A+ 받은거에여 간단 명료하게 정리했습니다.
목차
서론
들어가는 말
본론
배경
정변의 결과와 신정부 수립
혁신정강의 공포
결론
역사적 한계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1.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청나라의 깊은 간섭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젊은 개화파)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빨리 근대국가를 이룩하여야 한다고 주장.
2.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의존하여 서양의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개학파와 손잡고 급진 개화파의 주장에 반대함.
3. 급진 개화파는 빨리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기로 하고, 청불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 하자, 일본과 모의 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부를 세우려 함.
정변의 경과와 신정부의 수립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청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1883년부터 무장 정변을 모색하며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첫째, 박영효(朴泳孝)는 1883년 3월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되자, 그 곳에서 약 500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다.
둘째, 윤웅렬(尹雄烈)은 1883년 1월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로 있으면서 북청(北靑) 지역의 장정 약 500명을 모집하여 신식 군대로 양성하였다.
셋째, 김옥균 등이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徐載弼) 등 14명의 사관 생도들이 1884년 7월 귀국하여 갑신정변의 중요한 지휘 무력이 되었다.
넷째, 김옥균은 정변을 준비하기 위해 43명으로 이뤄진 비밀무장조직 충의계(忠義契)를 만들어 신복모(申福模)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개화당은 이와 같이 약 1,000명의 정변 무력을 양성하였다.
1884년 봄부터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이 짙어지자 청국은 1884년 5월 23일경 서울에 주둔시켰던 3,000명의 청군 중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 결과 서울에는 1,500명 청군만이 남게 되었다.
참고 자료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아틀라스 한국사
대학강의 노트교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