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5.16 군사 정변,유신체제,10.26 사태,12.12 사태,5.18 민주화 운동,6월 민주항쟁 조사하기
- 최초 등록일
- 2008.03.18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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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치학시간에 근현대사 부분을 배우면서 만든 것입니다.
간단하게 발단, 과정, 결과를 알기에 편합니다.
목차
4.19 혁명
5.16 군사 정변
유신체제
10.26 사태
12.12 사태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항쟁
※ 참고문헌 ※
본문내용
4.19 혁명
<발단>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로 인한 사회적 불안은, 3월 15일에 시행된 정․부통령 선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자유당정부는 경찰을 동원하고 3인조 감시투표, 사전투표, 투표용지 바꿔치기, 폭력행사’ 등 모든 불법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노골적인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은 선거 전인 2월 28일 대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자유당은 야당의 유세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인데도 학생들을 등교하게 지시하였고, 이에 학생들은 ‘인권옹호’를 주장하며 시위를 일으켰다. 이 같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유당은 3월 15일 사상 유례 없는 부정 선거를 저지르고 말았다.
<과정> 3월 15일 투표 당일, 마산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 시위 때 행방불명 된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이를 계기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에 국회 의사당 앞에서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자유당 정부는 폭력배를 동원하여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는 학생들을 습격, 많은 중경상자가 발생하게 하였다. 격분한 서울 시내의 대학생들은 4월 19일 총궐기하여 ‘민주주의의 사수, 이승만 정권의 퇴진’들의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로 향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당황한 자유당 정권은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 등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고 사태는 일단 가라앉았다.
<결과> 4월 25일 대학 교수단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400여명의 교수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도 다시 시위를 벌였다. 밤새 진행되던 시위는 다음 날이 되자, 참가 인원이 10만 명으로 늘어나 더욱 치열해졌다. 이에 결국 이승만은 허정에게 사태의 수습을 의뢰하고, 하야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이승만은 물러나고, 자유당 정권도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4.19는 대한민국 최초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한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시민과 학생들이 중심이 된 비폭력 혁명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