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삼국유사의 권 제 1 기이 제1 의 말갈과 발해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목차
1. 본문
2. 본론
1) 발해의 역사
2) 발해의 문화
3) 발해의 멸망
4) 말갈 - 말갈 7부와 어원
5) 중국의 발해사 인식과 우리나라의 반발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본 문》
말갈(靺鞨; 혹은 물길勿吉)과 발해(渤海)
<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추장(酋長) 조영(祚榮)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선천(先天) 연간(年間; 현종玄宗의 임자년壬子年)에 비로소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일컬었다. 개원(開元) 7년(己未)에 조영(祚榮)이 죽자, 그 시호(諡號)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世子)가 대(代)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명황(明皇)은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드디어 해동(海東)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땅에는 오경(五京)·십오부(十五府)·육십이주(六十二州)가 있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초년에 거란(契丹)이 이것을 쳐서 깨쳤다. 그 뒤로는 마침내 거란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의봉(儀鳳) 3年, 고종(高宗) 무인년(戊寅年)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그 여당(餘黨)을 모아 북으로 태백산(太伯山) 밑에 의지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개원(開元) 20年 경에 당의 명황(明皇)이 장수를 보내서 발해(渤海)를 토벌했다. 또 성덕왕(聖德王) 32年, 현종(玄宗) 갑술(甲戌)년에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登州)를 침범하자 현종은 이를 쳤다. 또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祚榮)의 성은 대씨이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고 했다. 위의 여러 글을 상고하건대 발해는 바로 말갈의 별종(別種)이다. 다만 그 갈라지고 합한 것이 서로 같지 않을 뿐이다. 또 <지장도指掌圖>를 상고해 보면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 모퉁이 밖에 있었다.
가탐(賈眈)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발해국(渤海國)의 압록(鴨綠) ·남해(南海) ·부여(扶餘) ·추성(추城) 등 사부(四府)는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이었다. 신라(新羅) 천장군(泉井郡; <지리지地理志>에는 삭주의 영현에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이다)에서 추성부(추城府)에 이르기까지 도합 39역(三十九驛)이 있다고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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