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건국세력(朝鮮王朝의 建國勢力)
- 최초 등록일
- 2008.04.03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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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4세기 후반 고려사회의 문제점과 조선왕조의 건국세력이 등장한 배경과 건국 과정을 참고자료를 토대로 하여 직접 정리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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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朝鮮王朝의 建國勢力(조선왕조의 건국세력)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高麗 社會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矛盾에 직면하고 있었다. 안으로는 元나라와 결탁한 權門勢族의 농장이 확대되어 民衆을 收奪함으로써 農民과 支配계급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러던 중 고려말에 이르러 元나라에 항거하는 韓族들의 반란인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元明교체기라 할 수 있는 이 같은 中國의 혼란을 틈타 공민왕은 元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반원 자주의 改革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나 밖으로는 元나라의 壓力과 안으로는 親元 세력들의 반발로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민왕의 努力이 무위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가 權門勢族을 견제하기 위하여 중앙으로 끌어들인 新進 士大夫 세력이 점차 성장하여 朝鮮이라는 새 왕조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權門勢族이 지배한 高麗 후반의 정치는 명분 없는 힘의 정치 그 자체였다. 그들은 개간의 명목으로, 또는 국가로부터 하사받는 형식으로, 심지어는 農民들의 土地를 빼앗는 방법까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土地를 늘려 나갔다. 그들이 보유한 토지는 `산(山과) 내(川)로 경계를 이룰` 정도였다. 그들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農莊`이라고 한다. 권문세족이 소유한 농장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그 규모도 막대하여 수백 결(結)에 이르는 광대한 농장이 허다하였다. 이러한 농장의 발달은 국가의 토지에 대한 공권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농장의 확대로 국가지배의 공전(公田)이 침식되어 관리들에게 녹과전(祿科田)을 지급할 수 없게 되었고, 奴婢와 農民이 農莊으로 흡수됨으로써 국가지배의 공민(公民)이 감소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결국 농장에 주어진 면세 면역의 특권에 의하여 國家財政이 궁핍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참고 자료
신명호, <<조선의 왕>>, 가람기획, 1998, P265
조석곤, <<한국근대토지 제도의 형성>>, 해남, 2005, P9,333
김두봉, <<조선왕조 기네스북>> 씨앤드씨, P4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