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단양적성비의 내용과 그 해석
단양적성비의 내용과 관련된 여러 논의점
기존의 논의들이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하여
목차
1. 머리말
2. 비문의 판독과 구분
3. 비문의 내용과 성격
4. 적성전사법
5. 비의 건립연대
6.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단양신라적성비(이하 적성비) 비의 발견 당시 비의 명칭으로 위무를 위한 按撫碑(김원룡), 拓境碑(변태섭), 宣撫碑(김석하), 築城碑(남풍현) 등의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1978년 2월 25일, 7월13일 두차례에 걸쳐 열린 단양신라적성비 제1차 학술좌담회의 결과 ‘단양 신라 적성비’라는 명칭을 확정하였다.(<단양신라적성비 제1,2차 학술좌담회록>, <<사학지>> 12.)
는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에 의하여 단양군 일대에서 온달(溫達)과 관련된 유적지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충청북도 단양군(丹陽郡) 단양면(丹陽面) 하방리(下坊里)의 적성(赤城)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의 높이는 93cm, 상폭은 107cm, 하폭은 53cm로서 화강암을 비면으로 이용하였다. 비의 상단부는 파손되었으나 좌우 양측면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므로 비문이 22행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으며, 매행의 글자수도 비편의 발견으로 20자였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202122행은 다른 행에 비하여 글자수가 적어 전체 430자 내외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글자 수는 288자이며 주변의 발굴을 통하여 수습된 비편 21자를 합하면 309자이다. 비의 글자는 상당히 얕게 새겨져 있으나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인지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거의 없다.
비문은 순수한 한문식이 아니라 신라식 이두문과 한문이 혼용되어 있다. 비에 사용된 서체(書體)는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의 해서체(楷書體)이지만 예서(隸書)의 여운(餘韻)이 강하게 남아 있다. 북조(北朝)의 비에서는 대체로 방필(方筆)을 사용하였고 남조(南朝)에서는 원필(圓筆)을 사용하였는데 본비는 서체상 남조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임창순, <단양적성비에 대한 우견 二, 三>, <<사학지>> 12, 단국대, 1978, 29~31쪽 참조.
글자의 판독은 완벽하지만 상단부가 파손된 까닭에 전체의 내용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이 글에서는 단양신라적성비의 판독을 중심으로 하여 비문의 성격을 알아보고, 비의 내용에 나오는 전사법, 법 등의 신라 율령과 관련된 내용과 건립연대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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