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분사회의 피해자, 백정(白丁)
- 최초 등록일
- 2008.04.09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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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안녕하세요!
사학과에서 발표할 때 제출한 레포트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책 찾아서 정성껏 만든 레포트입니다. 점수도 잘 받았구요 ^.^
많이들 가져가서 보시고 더 멋진 레포트 만드시길 바랄께요~
목차
1. 백정의 기원
2. 조선시대의 백정
3. 백정의 직업
4. 조선의 차별정책
5. 여전한 차별
본문내용
백정의 기원
백정(白丁)은 무식한 장정이라는 말로, 고려시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군역(軍役) • 기인역(其人役) • 역역(驛役) 등의 특정한 직역(職役)을 부담하지 않고 주로 농업에 從事하던 특수한 農民層을 말하였다. 따라서 백정이라는 말은 정호가 아닌 정호라는 뜻의 白丁戶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토지소유가 가능하였다. 역의 대가로 받을 수 있는 토지는 없었지만, 부를 축적하여 토지를 사거나,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이들은 역을 부담하지는 않았지만 국가 유사시에 한인(閑人), 학생(學生) 등과 함께 군역에 동원되었다. 그 대가로 백정대전(白丁代田)을 받았다. 또 신분 상승의 기회가 있었는데, 전쟁이나 국가가 필요로 할 때 공을 세우면 조금 더 높은 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백정
백정은 고려 말, 조선 초를 거치면서 평민, 양민, 백성, 촌민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세종 14년(1432)에 양인층의 확대를 위해 이들을 신량역천(身良役賤) 백정은 팔반사천(八般私賤)에 속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사천에 속하는 천민으로, 사노비(私奴婢) ·승려 ·백정(白丁) ·무당 ·광대 ·상여군(喪輿軍) ·기생 ·공장(工匠) 등이다.
으로 규정하여 양인으로 편입시켰다. 이것은 양인에게 부과하던 세금을 늘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양인이면서도 양인으로서의 입사(入仕)자격은 유보시켰다. 대신에 백정이라는 용어는 주로 도살업·유기제조업·육류판매업 등에 종사하던 천민(才人, 禾尺)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거기다 조선 전기에 도살업을 하던 거골장(去骨匠), 천민으로 신분이 하락한 사람이나, 유랑민 등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일반 평민들(고려시대의 백정)은 이들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를 꺼려하였으므로, 조정은 이들을 따로 신백정(新白丁)이라고 구분하였다. 나중에 ‘新’이 떨어져 나가면서 다시 水尺(사냥꾼, 가죽제조업자, 매춘부)과 白丁(屠殺꾼, 고리제품 생산자)으로 나누어졌으며, 그 가운데 백정은 수척보다 더 천한, 따라서 모든 사회구성원들 가운데 제일 천한 집단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백정이란 호칭은 조선사회에서 가장 천한 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굳어졌으며, 시대 변천에 따라 楊水尺, 水尺, 才人, 才人白丁, 新白丁 등 여러 별칭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백정은 시대에 따라 호칭이 달라졌고, 호칭도 직업에 따라 분화되었지만, 그들에 대한 대우는 여전히 다른 천민들보다도 더 낮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