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풍속화가 김득신을 소개하며-순간을 포착해 내는 화가 김득신
- 최초 등록일
- 2008.04.20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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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득신은 대대로 화원을 하여 유명한 개성(開城) 김씨 집안 출신의 화원으로, 김홍도의 선배로 알려진 김응환(金應煥)의 조카이며, 동생과 아들도 모두 화원이었다.
조선 후기 풍속화의 내용과 형식에서 김홍도를 가장 충실히 계승한 화가로 평가받는 그는,
김홍도 화풍이 형식화되어가면서 풍속화의 퇴영이 예고하는 출발선상에 놓여졌던 화가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과 소장의 <풍속화첩>과 1815년 62세 때 그린 호암미술과 소장의 8폭 병풍이 알려져 있다. 또 별도로 흩어진 화첩용 그림들이 비교적 여러 점 남아 있는 편이어서 풍속화가로서 김득신의 위치를 충분히 검증케 해준다.
목차
Ⅰ. 서론
1. 들어가며 . . .
1-1. 김득신 소개
Ⅱ. 본론
1. 김홍도 풍속화를 계승. 서민생활을 주로 표현
2. 김득신의 작품 감상
Ⅲ. 결론
1. 무엇을 배울 것인가?
2. 마치며...
본문내용
풍속화의 내용과 형식에서 김홍도를 가장 충실히 계승한 후배 화원은 김득신이다. 때로는 풍속화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 등에서도 두 화가의 필법이 흡사하여 낙관이 없는 경우에는 혼란을 초래할 정도이다. 또 김홍도 화풍이 형식화 되어가는, 풍속화의 퇴영을 예고하는 출발선상에 놓인 화가이기도 하다.
김득신은 화원 집안의 명문 출신으로 정조가 ‘김홍도와 더불어 백중하다’고 평할 정도로 기량을 인정 받았다. 그러나 만년에 오면서 창신(創新)한 맛보다는 기존의 도상을 재구성하는데 그치고 마는 답보적인 길을 밟았다. 오히려 앞의 풍속화에 비하여 현실감이나 회화적인 맛이 퇴행한 인상마저 든다.
김득신의 형식화는 김홍도가 말년에 관념화로 기울면서도 그 인생관에 걸맞은 무르익은 예술성을 구성 하였음과 잘 비교된다. 아홉 살 차이 나는 김홍도와 김득신의 시대 감각의 변화 곧 1700년대 후반과 1800년대 초반 사회 변동의 폭이 그만큼 컸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의 같은 시기이면서도 두 사람의 사회적 환경이 달라졌음은 그 교우 관계에서의 차이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김홍도는 강세황에서 북학파에 이르는 사대부 지식인들이나 여항 문학인들과 신분의 차이를 떠나 소통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홍도의 회화성과 18세기 후반 정조 시절의 수준 높은 학문과 예술은 그런 풍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비하여 1820년대까지 활동한 김득신의 경우는 교류의 폭이 넓지 못하였다. 그 큰 연유는 19세기 사대부들이 계급적 문화 차이를 강조하는 남중문인화 취향으로 보수성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19세기 순조 이후의 경직된 세도 정국 속에서 창조성보다 체제 유지에 급급했던 사대부층의 사회 의식과도 맞물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비록 형식주의화의 시발점이긴 하지만, 김홍도가 이룬 풍속도의 성과를 가장 충실히 전수하여 그 형식미의 수준을 일정하게나마 19세기 화단에 유지시킨 김득신의 역할은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참고 자료
국회도서관 논문자료 이용(http://www.nanet.go.kr)
- 김지연, 조선후기 풍속화에 관한 연구 :개성적 풍속화를 중심으로, 홍익대 대학원, 2005
참고 사이트
- 뉴스코리아
(http://www.wnewskorea.com)
- 경향신문
(www.khan.co.kr)
기타 검색사이트 백과사전, 블로그 참조
- http://blog.naver.com/kjsoo123?Redirect=Log&logNo=110000334285
- http://memolog.blog.naver.com/rjtpdj/68
- http://blog.naver.com/rupinakmk?Redirect=Log&logNo=140029112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