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광개토 대왕릉비에 관하여 정리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배경 및 건립목적
2. 원문
3. 원문 해석
4. 주목 논쟁
5. 논쟁을 통하여
본문내용
1. 배경 및 건립목적
광개토왕은 임자년(壬子年412)에 붕어(崩御)하였다. 빈전(殯殿)에서 일정기간 빈례(殯禮)을 치른 것으로 보인다. 『주서』고려조에서 “부모와 남편상에는 그 복제(服制)를 주국의 경우와 같이한다”라고 한 점이나, 『수서(隋書)』고려조에 보이는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안치하여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를 지낸다.”고 한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3년 상을 행하였을 것이다. 붕어 2년 후인 갑인년(甲寅年414) 9월 29일에 산릉으로 옮겨진다. 이 때 비(碑)도 같이 세우게 된다. 장소는 국강상이다.
그 정확한 위치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으며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세워져 있다. 비는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지안 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져 지금에 이른다.
이 광개토왕릉비는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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