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국문학개설시간에 향가 <원왕생가>의 작자문제에 관해 쓴 소논문입니다. 다양한 자료와 다양한 의견을 검토하여 나름의 결론을 내린 소논문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광덕 엄장’조의 내용
Ⅲ. <원왕생가>가 집단창작물이라는 주장
Ⅳ. 광덕설로 보는 <원왕생가>의 작자
ⅰ. <원왕생가>와 불교의 미타신앙
ⅱ. 此身遺也置遣(이 몸 남겨두고)와 작자문제
ⅲ. 광덕과 엄장의 신분
Ⅴ.맺음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향가란 신라시대에 가창된 우리말 노래를 총칭한 용어인데, 현재 鄕札 문자로 표기된 신라시대의 시가 14수와 고려 초기 均如의 <普賢十種願往歌> 11수 및 睿宗의 <悼二將歌>를 두고 지칭하되, 전자 25수를 협의의 향가, 후자 1수를 광의의 향가로 다루고 있다.<원왕생가>는 문무왕 때 신도들이 서방정토 왕생을 기원해 읆은 노래로 사뇌가 형식의 향가이다. <원왕생가>의 작자에 대한 논의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한데 대체로 보아 광덕처설, 광덕설, 원효설, 엄장설, 전승민요설, 불찬가(佛讚歌)라는 특수 기능의 창작가요설 등으로 정리된다. 이 글에서는 광덕을 작자로 상정하여 <원왕생가>의 작가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광덕 엄장’ 조의 내용
『삼국유사』 감통 제 7편 ‘광덕 엄장’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무왕(文武王)시절,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라는 두 사문(沙門)이 있었다. 둘은 우정이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 그들은 먼저 극락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서로 꼭 알리자고 늘 다짐했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은거하여 신 삼는 것을 생업으로 하며 아내를 데리고 살았고,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대규모로 밭갈이를 하면서 지냈다.
어느 날 해그림자가 붉은 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어갈 무렵 엄장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이렇게 알렸다.
"나는 이제 서방(西方)으로 가네. 그대는 평안히 머물다 속히 나를 따라오도록 하게."
엄장이 문을 밀고 나가 살펴보니 멀리 구름 밖에서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광명이 땅에 뻗쳐 있었다. 이튿날 엄장이 광덕의 거처로 찾아가보았더니, 과연 광덕은 죽어있었다.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일을 마치고 엄장은 광덕의 아내에게 말했다.
"남편은 이미 갔으니 나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소?"
광덕의 아내는 좋다고 대답했다. 드디어 엄장은 자기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광덕의 집에 머물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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