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의 역사, 인구 및 생활환경
- 최초 등록일
- 2008.05.26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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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리 수업 중 동두천에 관해 레폿을 써 내야되서 직접 시청을 찾아 동두천 통계연보등을 받아
다양한 지도와 연표를 사용해서 작업하였다. 동두천이라는 한 시에 대한 자료가 필요하다면 상당한 도움을 드릴 수 있다고 판단된다.
목차
1. 들어가며
2. 역사
3. 자연환경
4. 인구
5. 시민생활
<추가지도>
본문내용
5) 근현대의 동두천
1895년의 지방관제개편 때 군으로 되었으며, 1914년에도 고양주군이 양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919년의 3.1운동때 홍덕문 등이 1천여 군중을 인솔하여 동두천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동두천은 조선 후기까지 양주군의 이담면으로 지금의 시관할 구역과 거의 비슷한 안흥리, 하봉암리, 동막리, 내동, 연동, 창동, 걸산리, 황매리, 가정자리, 행당리, 지동, 동두천리, 상봉암리, 축산리, 광암리 등 18개 리로 되어있으며 한때는 일담면(一淡面)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6.25 동란으로 미보병 7사단이 주둔한 이래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여 근대도시로 발전하면서 1963년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0년 4월 1일 남양주군이 신설되면서 다시 이해 7월 1일 동두천시로 승격되어 오늘날까지 최대의 기지촌으로 서장해 왔다.
근대 이후 여러 차례의 행정제도 개혁과 행정구역 개편이 실시되었다. 1914년 일제는 이른반 군 중심의 행정에서 면 중심의 행정으로 전환시켰다. 이에 따라 3~4개 군현을 1개 군으로 통합하고 이어 면단위 행정구역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당시 현 동두천시 영역은 양주군 이담면이 주요지역이었으며 1980년까지도 커다란 변동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7호로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고, 1973년 2월 14일 양주군 조례 제351호로 광암출장소가 개설되었고, 이어 1979년 5월 1일 양주군 조례 제629호로 생연․보산․소요 출장소가 개설되었다. 같은 행 7월 1일 법률 제6542호로 포천군 포천면 탑동 3개 리가 동두천읍으로 편입되는 등 약간의 행정구역 확장이 있었을 뿐이다.
<행정구역>
1981년 7월 1일 법률 제 3425호로 동두천시 승격으로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이룰 수 있었다. 이때 생연 1~7리가 생연 1~4동이 되고, 보산 1․2리와 걸산리가 보산동으로, 생연리․지행 1․2리와 송내리가 내행동으로, 동두천 1․2리와 안흥1․2리가 동안동으로, 상봉암리․하봉암리가 소요동으로, 광암 1․2리와 탑동1․2․3리가 광암동으로 개편되는 등 총 9개 동으로 개편되었다.
참고 자료
동두천통계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