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웨슬리 비교연구
- 최초 등록일
- 2008.05.26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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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서 정말 빠뜨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큰 두 인물의 생애와 구원론을 살펴보았다. 종교에 있어서 특히 감리교와 장로교를 대표하는 인물인 칼빈과 웨슬리의 생애, 사상, 구원론을 살펴봄으로 신학적인 핵심정리와 구원의 이해를 한눈에 알아보도록 정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였다.
목차
Ⅰ 생애
1. 존 칼빈의 생애
2. 존 웨슬리의 생애
Ⅱ. 존 칼빈과 존 웨슬리의 구원론
1. 존 칼빈의 구원론
2. 웨슬리의 구원론
나의 생각
본문내용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피카르디(Picerdy) 주의 노용(Noyon)읍에서 변호사이면서 노용 대성당 참사회의 중요한 위치인 법률자문관이었던 아버지 제라드 코뱅(Gerard Cauvin)과 지방귀족의 딸인 어머지 잔느 라프랑스(Jeanne La France) 사이에서 태어났다. 칼빈은 14세에서 19세까지 파리의 대학들에서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에라스무스 등의 인문주의에 매력을 느꼈다. 처음에 라 마르셰대학에서 라틴어를 배우던 칼빈은 몽테규대학으로 옮겼다. 칼빈은 대학에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특히 왕의 주치의 윌리암 콥의 자제 니콜라스 콥을 만나 종교개혁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5년 후 칼빈은 신학연구 자격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법학으로 전공을 바꾸라는 부친의 요구로 오를레앙대학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1년 후 부르쥬대학으로 옮겨서 볼마르(Melchor Wolmar) 교수에게서 헬라어를 배웠다.
1533년 칼빈은 종교개혁신앙을 발견하고 가톨릭을 떠났다. 1534년 칼빈은 성직소명특혜를 포기하고 이듬해에는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섬으로 가톨릭의 박해를 받게 되어 이를 피해 파리에서 바젤로 피신하여 연구에 몰두했고, 그곳에서 프로테스탄트 최고의 신학적 저서인 ‘기독교강요’를 발간(1536)한다. 빌헬름 파렐의 제네바의 개혁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고 개혁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536년 10월 로잔에서 가톨릭 측과의 신학토론을 벌이고 1537년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례’를 시의회에 제시하여 채택된다. 그래서 제네바 시의회는 모든 주민이 ‘신앙고백서’에 대하여 서약하도록 하였으나 주민들의 저항이 강하게 일어났고 1538년 새 시의회가 선출되자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혼란이 가중되어 1540년 시의회의 요청으로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은 1541년 새로운 교회제도를 조직을 위해 ‘교회법규’를 시의회에 제출하여 채택되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