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분(전방후원분)
- 최초 등록일
- 2008.05.29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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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고분(전방후원분)의 기원과 한국과 일본의 견해차이와 여러학설을 정리한 레포트
목차
◆ 전방후원분(장고분)이란
◆ 한국의 전방후원분(장고분)
◆ 일본의 전방후원분
◆ 고분의 분포 및 특징
① 전기(3세기 말~5세기 말)
② 후기(5세기 말~7세기 말) : 아스카시대와 중첩
◆ 전방후원분(장고분) 기원에 대한 한국, 일본의 주장
① 전제조건
② 한국의 주장
③ 일본의 주장
③ 일본의 주장
④ 한국의 일본기원설 주장
◆ 연구가 계속 되는 이유
◆ 나의 생각
본문내용
◆ 전방후원분(장고분) 기원에 대한 한국, 일본의 주장
① 전제조건 : 이 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서기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즉 약 100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하고 등장했다가 사라져 버린 묘제라는 점. 또 영산강 유역에서 겨우 13기만이 조사되었다는 것. 반면 일본에는 2,000여기나 확인 조사됐고 조성시기도 3세기 중반~6세기 후반까지다. 결국 이 장고형 고분은 조사된 무덤의 수나, 조성시기를 살펴보면 일본 쪽이 앞서고 있음.
② 한국의 주장 : ⅰ) 고대 경상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고향의 집자리 지형, 즉 전방과 후원으로 생긴 구릉을 골라 나무곽을 배치해서 만든 묘제라고 주장.
ⅱ)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가운데 원형의 적석부에 네모난 형태의 제단 형태 석축단이 조성된 것에서 비롯됐다”는 고구려 기원설주장.
ⅲ) “원분(둥그런 무덤)과 방분(네모난 무덤)의 결합으로, 그리고 원분과 제단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 원류는 우리나라”라고 주장.
ⅳ)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영산강 유역에서 살았던 마한 토착세력의 수 장이라는 주장.
ⅴ) 영산강 유역의 수장들이 왜와의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고분인 장 고분을 썼다는 주장.
ⅵ) 마한세력이 백제의 영향권 밖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규슈지방도 일본의 중앙세력에서 벗어나 있어서 두 세력간의 교류를 통해 무덤 형식을 들여와 썼다는 주장.
ⅶ) 백제가 마한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왜와의 교류를 통해 ‘전방후원분’ 을 본 마한세력이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왜의 묘제를 썼 다는 주장.
③ 일본의 주장 : ⅰ) 분구묘, 즉 네모나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의 돌출 부가 환경에 따라 변화하여 이른바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자생설을 주장.
ⅱ) 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종사하 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썼다는 주장 ⅲ) 일본의 연구자들 가운데 왜 계통의 사람들이 영산강유역에 살았다는 데 이들이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진출해 왜의 무덤형태를 썼다는 주장.
참고 자료
없음